[씨네리뷰]'아이리스', 치매걸린 철학자의 애달픈 몸부림

  • 입력 2002년 3월 7일 17시 45분


영화 ‘아이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여성 철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아이리스 머독(1918∼99년)의 삶을 소재로 다뤘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머독은 옥스퍼드대에서 비트겐슈타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5세 때 처음 발표한 ‘그물 아래’ 등 25편의 소설을 쓴 대표적인 지성.

이 작품에서 가장 상징적이면서 충격적인 것은 말년의 머독(주디 덴치)이 치매 검사를 받는 장면이다.

“언어는 곧 사고”라고 주장해온 당대의 지성 머독은 ‘개(dog)’라는 글자를 ‘신(god)’으로 읽는다. 의사는 영문학자이자 머독의 남편인 남편 돈 베일리(짐 브로드벤트)에게 “부인의 뇌속에 있는 정보가 지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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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지워졌다!

이처럼 명쾌하고 현대적인 진단이 또 있을까. 그러나 아이리스 부부는 의사의 ‘정보 삭제 진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영화는 이같은 부부의 아픈 가슴을 담아냈다. 원작은 베일리가 40여년에 걸친 머독과의 결혼생활을 회고한 ‘엘레지 포 아이리스(Elegy for Iris)’.

이 작품은 전기 영화 특유의 상투적인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베일리의 작품이 원작인 이유도 있겠지만 영화는 머독의 일생 뿐 아니라 사랑과 때로 질투의 시선이 뒤섞인 채 평생 머독의 곁을 지켜온 남자의 애증을 비중있게 다뤘다.

아이처럼 돼 버린 머독을 뒷바라지하던 베일리는 넌더리를 치며 “그 놈과 같이 잤냐. 이제는 나밖에 없지”라며 아내를 흔들어댄다.

영화는 두 부부의 만남을 중심으로 치매에 걸린 머독의 끔찍한 현재와 찬란한 성공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수시로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샤인’ 등 고난을 이겨낸 인간의 위대한 승리나 인생의 정점(頂點)에서 영화의 마침표를 찍는 계산된 감동은 없다. 전기 영화의 익숙한 흥행 공식을 기대한다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올해 아카데미 개인상 부문에 나란히 노미네이트된 세 배우의 탁월한 연기와 균형잡힌 조화가 인상적이다. 주디 덴치와 케이트 윈슬렛이 각각 노년과 젊은 시절의 머독으로 출연해 여우주연상과 조연상 후보가 됐다. 머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나 영화가 끝난 뒤 정작 “머독이 누구지”라는 의문이 남는 게 아쉽다. 감독은 주로 연극을 연출한 리처드 아이어. 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이 대사!

#치매에 걸리기 전 머독의 연설

머독〓인간은 사랑을 나누죠. 섹스로 우정으로, 또 애정으로. 인간은 서로는 물론, 동식물과 돌까지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찾고 추구하는 행복은 이런 사랑과 상상력으로 완성되죠.

#치매때문에 소동을 일으키는 부인 머독을 베일리가 진정시키는 대목

베일리〓내 귀여운 생쥐, 우리 예쁜이. …. 예전엔 당신과 단둘만 남는 게 두려웠는 데 이젠 당신없인 못살아. 그만 집에 가자구. 내일은 또 새날이 밝겠지.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날이 갈수록 우린 점점 더 가까워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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