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아메리칸 사이코>vs<시계 태엽 오렌지>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1시 46분


<<2000년 선댄스 영화제에 소개되어 많은 화제를 모았던 <아메리칸 사이코>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71년작 <시계 태엽 오렌지>의 미국 버전 같은 영화다. 시대적 강박관념에 매몰된 사이코 킬러를 주인공으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독설을 퍼붓는 두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와 <시계 태엽 오렌지>의 '따로 또 같은' 이야기를 분석한다(편집자 주).>>

먹고, 마시고, 놀고, 싸고, 뱉고, 피우고, 하고 또 하고…. 세상을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들은 몇 개의 동사(Verb)로 다 설명될 수 있을 만큼 간결하다. 그러나 동사와 동사 사이의 행간에서 일어나는 심리 변화는 천길 물 속 마냥 복잡하다. 지독한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 해변가.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땐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평범한 듯 보이는 누군가가 일순간 사이코 킬러로 돌변한 이유? 그 이유는 있으면서 또 없다.

◇사이코 vs 사이코

메리 해론 감독의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2000)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 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71)는 아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 킬러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이코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하고 남을 해치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인다.

한쪽 눈 밑에 긴 속눈썹을 붙이고 등장하는 <시계 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말콤 맥도웰)는 4인조 엽기 사이코 집단의 리더다. 영국 미니시펄 북쪽 18번지에서 살고 있는 이 어린 사이코(10대 후반)는 매일 밤 '산디메코'라는 이상한 음료수를 마시고 폭력의 세계로 진입한다.

알렉스의 '성장 후 모습'일지도 모를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찬 베일) 역시 '인종 청소기'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을 죽여버리는 데 재미를 붙인 인물이다.그러나 알렉스가 영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것에 반해 페트릭의 주무대는 다르다. 그는 뉴욕 웨스트가 아메리칸 가든 빌딩에서 '폼 나게' 살며, 밤마다 '가공의 실체'로 돌변한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은 첫 번째 희생양을 모두 거리의 부랑아로 택했다. <시계 태엽 오렌지>의 첫 번째 희생자는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며 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나이 든 술주정뱅이다. 괴상한 성적 상징물들로 장식된 크로바 카페에서 '산티메코'를 들이킨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은 돈을 구걸하는 노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흘러간 노래를 불러대는 냄새나는 술주정뱅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마치 오케스트라 소음 같군."

아무 고민 없이 긴 지팡이를 휘둘러 부랑아의 배를 찔러대는 그들은, 차갑고 섬뜩한 눈빛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시계 태엽 오렌지>의 알렉스가 부랑아를 살해한 지 30년 후,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도 같은 이유로 거리의 부랑아를 응징한다.

"왜 열심히 일해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는 거지?"

패트릭은 부랑아에게 야유 섞인 한 마디를 던지며 알렉스가 그랬듯 거지의 배를 찔러 목숨을 빼앗는다. 다만 쥐고 있는 흉기가 지팡이에서 칼로 바뀌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알렉스와 패트릭은 여성을 성적 학대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알렉스의 희생자 중엔 여성이 꽤 많은데, 그는 여성을 살해할 때마다 강간을 저질렀고 때론 남성 성기를 본뜬 조형물로 내려치기도 했다. 패트릭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아서, 트리플 섹스를 즐기다 갑자기 파트너를 살해하는 등 여성을 영원한 성적 학대의 대상으로 그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처럼 치료 불가능한 사이코 킬러들의 광적인 살인 취미는 과연 '법대로' 처벌될 수 있을 것인가. <아메리칸 사이코>와 <시계 태엽 오렌지>는 영화 후반부, 사이코 킬러가 경찰의 레이더망에 걸려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계 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는 폭력의 대가로 그에 필적할 만한 극단적인 폭력을 부메랑처럼 되돌려 받으며,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은 비록 수사망을 교묘히 피해갔지만 자신의 일탈 성향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학증세를 보인다. 패트릭의 내레이션을 빌자면, 그건 폭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두 사이코 킬러의 공통점은 이것 말고도 많다. 음악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한다는 것(알렉스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광적으로 좋아하고, 패트릭은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와 필 콜린스의 광적인 팬이다), 남들과는 다른 패션을 즐긴다는 것(알렉스는 성기 돌출을 과장한 희색 원피스와 검은 색 모자, 속눈썹을 눈 밑에 붙이는 기괴한 패션을 지향하고, 패트릭은 부르주아의 전형처럼 온갖 사치품들과 고급 패션, 여성스러운 팩과 다이어트를 즐긴다) 등 보편적인 그 시대의 가치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캐릭터가 바로 그들이다.

◇이유는 없다

<시계 태엽 오렌지>와 <아메리칸 사이코>의 두 사이코가 광적으로 살인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언컨대 '없다'. 그들은 그저 무료하고 심심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을 뿐이다. 그들의 살인행각에 '왜'라는 물음을 다는 건 참 쓸데없는 짓이다. 보편적인 삶의 궤도에서 일탈하는 방법을 찾던 중, 그들은 결국 살인이라는 최상의 목표지점에 도달한 것뿐이다.

알렉스와 페트릭은 모두 절대 자신들이 왜 밤마다 무법자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살인과 살인 사이에 중첩된 '심리적 여정'은 무시되고, 그저 살인을 저지르는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다. 결론은 물론 "나도 날 어쩌지 못하겠다"는 푸념으로 끝난다.

찔러 죽이고, 베어 죽이고, 무언가로 쳐서 죽이고, 손발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기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엽기적인 살인광이 되었다. 과연 그들은 그저 일탈을 위해 그토록 과감한 살인을 자행했던 것일까. 아직 어린 아이 축에 속하는 알렉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성장한 어른인 패트릭 베이트먼의 살인 행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유는 있다

따지고 보면 영국과 미국의 지난 세기를 대변하는 두 사이코들의 살인행각엔 단언컨대 '이유가 있다'. 알렉스와 패트릭만 모르고 있을 뿐,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시대적 강박관념이 탄생시킨 '이유 있는 사이코 킬러'다. 이들의 살인행각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영화 속 사건이 일어났던 시대를 알 필요가 있다.

<시계 태엽 오렌지>는 50년대에 벌어진 청소년 갱 사건을 담은 60년대 소설을 원작으로, 7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다. 영국의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관통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기계화된 인간을 중시하는 영국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시계 태엽 오렌지'는 '기계화된 세상에 어울릴 수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의미심장한 제목. 영국 속담 중에 "시계 태엽 오렌지처럼 기묘한"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거대 조직에 수반되는 기계적인 작업이 결국 필연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끌어낼 수밖에 없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시계 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는 산업사회 이후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낙오된 '모순의 전형'으로 읽어낼 수 있다.조직화의 첫 번째 과정인 학교에서 낙오되고, 가정에서조차 낙오된 알렉스는 전쟁과 경제 불황의 늪을 잘 견뎌온 영국의 6,70년대를 비꼬는 '독설'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계 태엽 오렌지'보다 훨씬 직설적인 제목을 차용한 <아메리칸 사이코>는 80년대 사건을 담아낸 90년대 소설을 원작으로, 200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다. <아메리칸 사이코>가 비판하는 것은 물론 미국이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자본주의의 최대 첨병인 '소비 문화'가 만들어낸 시대적인 자폐아다. 극단적으로 소비문화를 향유하지만, 오히려 그 안에 침몰된 것처럼 보이는 시대의 낙오자. 균형 잡힌 식단으로 음식을 조절하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매를 만드는 그는, 알고 보면 속이 텅 비어있다.

영화는 그의 극단적인 소비취향을 알려주기 위해 갖가지 현란한 소비재의 이름을 읊조리는 데 많은 부분 투자한다. 온 몸에 허니 아몬드를 바르고, 얼굴엔 젤과 허브팩으로 수분을 공급하고, 무 알코올 애프터 쉐이브 로션, 아이 크림까지 꼼꼼히 챙겨 바르는 그의 얼굴엔…자본주의 물질문명의 기름기가 번지르르 하게 흐른다.

패트릭이 대변하는 80년대의 문화는 그런 식이다. 물질이 정신을 능가하고, 생각보다는 몸이 우선시 되는 사회. 그의 악취미는 좋은 레스토랑을 선별하고, 멋진 옷과 화장품을 골라 쓰는 것만큼 쉽고 가까운 행위로 그려지고 있다.

과격한 폭력과 섹스로 채워진 두 영화는 그러므로 시대와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인간에 대한 섬세한 고찰에 다름 아니다. <시계 태엽 오렌지>와 <아메리칸 사이코>를 찬찬히 뜯어보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난 반세기가 예쁜 포장지에 둘러싸이지 않은 채 과감히 벗겨지는 느낌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엔 모두 젠 체 하지 않는 반항정신으로 시대의 모순을 벗겨내려는 용감함이 엿보인다.

◇시대적 강박관념

시대적 강박관념에 매몰된 두 사이코 킬러는 그러나 '영화'를 보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시계 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는 나치가 등장하는 폭력 영화를 보며 자신의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그는 헛구역질을 해대며 "더 이상 못 보겠어요"라고 소리지른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먼은 살인의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영화'를 이용한다. 살인 전후 그가 즐겨보는 영화는 <텍사스 살인마>와 <레드 바이블 다이어리>다. 그는 이 두 편의 영화를 교본으로 삼아 정말 '텍사스 살인마'처럼 전기톱 살인 사건에 동참한다.

또 두 영화는 사이코 킬러의 치료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이나 <사랑은 비를 타고>의 메인 테마(Singing In the Rain)를 읊조리며 살인을 저질렀던 10대 후반의 알렉스는, 라스트신에서 "이젠 내 병도 다 치료가 됐다"고 말한다. 진짜 그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폭력에 대한 폭력 치료' 덕분에 그는 폭력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은 다르다. 언제나 가해자였을 뿐 희생자가 된 적이 없는 패트릭의 광기는 영화 후반부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카타르시스는 없다"는 말로 살인에 대해 무뎌진 감각을 언급할 뿐이다.

미국에서 이미 <시계 태엽 오렌지>의 후속 편으로 취급되며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던 <아메리칸 사이코>는 <시계 태엽 오렌지>를 패러디한 후, 또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영화다. 그러나 70년대에 만들어진 <시계 태엽 오렌지>가 오히려 2000년대 사이코 킬러보다 과감한 방식으로 시대에 저항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알렉스의 젊은 반항정신은 27세 나이 든 킬러의 그것보다 훨씬 힘이 세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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