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정치인과 도덕성

  • 입력 2000년 4월 4일 19시 51분


재산과 납세실적, 병역과 전과(前科) 등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신상정보 공개가 선거를 코앞에 둔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민주당은 이것이 선거전의 열세를 만회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장담한다. 자민련과 민국당도 정치적 반사이익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상대적으로 큰 ‘피해’가 예상되지만 정보공개 그 자체까지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건 무엇보다도 정보공개에 대한 여론의 압도적 지지 때문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성난 유권자들의 감정적 비난이다. 입 제대로 달린 사람치고 정치인 집단을 향해 혼잣말로라도 한두 마디 거친 욕설을 날리지 않은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저잣거리의 분위기가 이렇게 험악하면 신문과 방송도 따라가기 마련이고, 언론의 험악한 보도와 논평은 시중의 비난 여론을 더 뜨겁게 달구어 놓는다. 이런 판국에 정보 공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정치인들이 무슨 특별히 악질적인 범죄자들의 집단이나 되는 것처럼 모질게 질타하는 분들에게 이것 하나는 꼭 물어보아야 하겠다. “문제가 있는 곳이 정치권뿐인가? 정치인들이 다른 사회 집단에 비해서 특별히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게을리 하고 파렴치한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사람들의 집단인가?” 내가 보기에 그렇게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들은 다만 우리나라에서 사업하는 보통 사람들이 보통 하는 정도, 보통 하는 방법으로 탈세 또는 절세(節稅)를 했을 뿐이다. 행정 사법 언론 재계 등 다른 모든 분야의 권력자와 부자들이 다들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이런저런 병역면제 사유를 만들었을 따름이다.

정치권은 청정해역 대한민국에 홀로 뜬 부패의 섬이 아니다. 정치인의 부정부패는 ‘총체적 부패공화국’ 대한민국의 수많은 얼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고 설킨 부패의 먹이사슬을 이루는 하나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은 억울하다. 촌지와 뇌물을 주고받으면서,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반세기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낯을 바꾸어 정치인들을 맹렬하게 비난함으로써 자기가 저지른 똑같은 부정부패를 감추는 알리바이로 삼은 셈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점은 또 하나 있다. 후보자의 신상정보 공개는 이번에 처음 도입하는 제도다. 이번 총선 후보자들이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이런 제도가 없었다. 돈이 있으면 권력도 살 수 있고, 권력을 가지면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고, 그러면 명예도 저절로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에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달리 할 수 있는, 또는 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을 그대로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명예와 권력까지 가지려고 하다가 감추어진 비리가 드러나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국회의원 출마를 하지 않았을 사람도 많다. 정보공개가 진작 제도화되었더라면 이런 사람들은 그저 탈세를 하고 자식을 군대에서 빼내고, 외제차 타고 골프 해외여행 하면서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머물렀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직선거 후보자 신상공개 제도는 우리나라의 정치엘리트 충원 과정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이 처음 도입되는 16대 총선 출마자들의 ‘억울한 사정’은 역사가 짐 지워준 운명이다. 중학생 시절에 벌써 대통령을 꿈꾸었다는 어느 전직 대통령처럼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둔 젊은이들은 세금을 잘 내고, 현역으로 병역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며, 동네 파출소라도 피의자로서 출입하는 일은 없도록 처신을 삼가야 한다.

온 사회가 다 썩었는데도 정치인들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는 항변은 아무 소용이 없다. 권력에는 언제나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사회 전체가 부패의 늪에 빠져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에게 보통사람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게 싫은 사람은 정치를 그만두면 된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