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실패로 무너진 볼리비아 좌파 정권… 칠레 우파 정권도 흔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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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국가들 경제난에 정국 혼돈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던 반정부 시위대가 10일(현지 시간) 행정수도 라파스의 거리에서 사임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라파스=AP 뉴시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던 반정부 시위대가 10일(현지 시간) 행정수도 라파스의 거리에서 사임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라파스=AP 뉴시스
2006년부터 14년째 집권 중인 중남미 최장수 좌파 지도자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60)이 선거 부정 논란에 10일 사임했다. 경제지표 악화 속에 개헌까지 하며 무리하게 4선 연임을 시도해 민심에 불을 붙였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시작된 칠레 반정부 시위 등 중남미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시위의 공통점은 경제난과 정권의 부도덕성이란 분석이 나온다. 멕시코 일간 엘우니베르살은 “중남미가 시뻘건 분노로 달아오르고 있다”고 표현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모랄레스 대통령은 이날 TV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지난 3주간 반정부 시위로 이미 시민 3명이 숨지고 300여 명이 다쳤다.

시위는 지난달 20일 대선으로 촉발됐다. 당일 중간개표 결과 모랄레스 대통령은 45.3%를 득표해 야권 후보인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보다 약 7%포인트 앞섰다. 볼리비아 대선은 1위 후보의 득표율이 40%를 넘고 2위 후보와의 격차가 10%포인트 이상일 때 결선투표를 치르지 않는다. 이때 선거관리 당국이 돌연 개표 공개를 중단했다가 24시간 후 재공개했다. 그러자 모랄레스 대통령은 47.1%를 득표해 경쟁자를 10.6%포인트 차로 앞섰고 결선투표 없이 당선됐다. 야권은 거세게 반발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이 혈세로 대통령궁을 새로 짓고 생가를 자신의 기념관으로 만든 사실도 시민 분노를 자극했다. 수세에 몰린 그는 ‘대선 재실시’를 주장했지만 군 최고사령관과 경찰 수장까지 사퇴를 요구하자 백기를 들었다.

칠레에서도 지하철 요금 인상이 발표된 지난달 6일부터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BBC에 따르면 칠레의 최저임금은 월 426달러(약 49만4100원)이며 저소득층은 월급의 30%를 지하철 요금에 쓰고 있다. 경찰의 과잉 진압은 사태를 더 키웠다. 이미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뉴욕타임스(NYT)는 “시위 격화 후 2주간 180명이 고무탄 등에 맞아 심각한 눈 부상을 입었다. 눈 부상이 전염병처럼 번진다”고 전했다. 이 중 30%는 한쪽 눈을 실명했고 60%는 심각한 시각 손상에 시달리고 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70)은 이 와중에 가족과 최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부인은 시위대를 ‘외계인’으로 폄훼했다. 최저임금 인상, 헌법 개정 추진 등 그의 개혁안에도 성난 민심이 가라앉지 않는 이유다.

겉으로는 두 나라의 혼란이 선거 부정과 공공요금 인상이란 단편적 이유에서 기인한 듯하지만 배후에는 누적된 경제 실패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인 모랄레스 대통령은 주력 산업인 천연가스 수출이 호황일 때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주의 지도자’란 평가도 받았다. 최근 천연가스 수출이 침체되고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8%까지 불어난 가운데 경제 성장 과실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자 도시 빈민이 급증했다.

현재 33개 중남미 국가 중 볼리비아와 칠레를 포함해 최소 8개 국가의 정국이 불안정하다. 우파가 집권 중인 카리브해 최빈국 아이티에서는 지난해 7월부터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2017년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수십억 달러를 유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민심이 분노했다. 중도좌파 레닌 모레노 대통령이 이끄는 에콰도르에서는 휘발유 경유 보조금 폐지로 지난달 3일부터 반정부 시위가 불붙었다.

정권 교체도 빈번하다. 우파 정권이 89년간 집권했던 멕시코에서는 1월 좌파 대통령이 탄생했다. 우파 정권의 부패와 고질적 치안 불안이 낳은 결과였다. 4년 전 우파 정권을 출범시킨 아르헨티나 유권자들도 고물가, 고실업, 화폐가치 하락 등이 계속되자 지난달 27일 대선에서 좌파 후보를 선택했다. 과거 중남미에서 반미, 반제국주의 등 뚜렷한 정치색을 표방한 시위가 빈번했던 것과 달리 현재의 시위는 집권당의 정치 색깔에 별 관심이 없다. 좌파든 우파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든 정권을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시민들의 경고가 준엄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시위의 ‘탈(脫)정치’ 색깔이 뚜렷한 데다 양극화를 단기간에 해소하기도 힘들어 상당 기간 반정부 시위가 계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지니계수는 0.31이지만 이 8개국의 평균은 0.45에 이른다.

워싱턴포스트(WP)는 “좌파 정권인 볼리비아, 우파 정권인 온두라스, 중도를 자처한 에콰도르에서 모두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시위대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지역 (경제)정책에 초점을 맞춘 정치인을 원한다”고 분석했다. 중남미 전문 이코노미스트인 마이클 리드는 가디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는 불평등을 감수할 수 있었지만 나와 자녀의 임금이 오를 것이란 기대가 사라진 지금 분노가 폭발했다”고 분석했다.

최지선 aurinko@donga.com·전채은 기자
#중남미#반정부 시위#볼리비아#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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