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결 재구성] 평양 원정대가 들려주는 ‘평양 48시간’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10월 18일 05시 30분


지난 13일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이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리는 북한과의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원정 3차전을 위해 출국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스포츠동아DB
지난 13일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이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리는 북한과의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원정 3차전을 위해 출국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스포츠동아DB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은 2022카타르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H조 원정 3차전을 위해 북한 평양을 다녀왔다. 1990남북통일축구대회 이후 29년 만에 이뤄진 남자대표팀의 평양 입성, 김일성경기장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제창된다는 설렘은 금세 씁쓸함이 됐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정몽규 회장, 최영일·김판곤 부회장 등 대한축구협회 임·직원, 선수들까지 55명으로 구성된 태극 원정대는 육로로 두 시간에 닿을 가까운 거리를 돌고 돌아 14일 평양에 입성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15일 끝난 경기는 득점 없이 무승부로 끝났지만, 베이징발 에어차이나 여객기가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직후부터 여기저기 볼멘소리가 터졌다는 후문이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실명 보도를 전제로 태극전사들과 대표팀 스태프, 협회 관계자 등 복수 인물들의 전언을 모아 1인칭 시점으로 이번 일정을 재구성했다.

● 평양 입성(14일)

비행기가 순안공항에 착륙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입국심사대 앞에 늘어선 줄이 줄지 않는다. 입국신청서 작성이 잘못됐다며 계속 돌려보낸다. 누구도 예외 없다. 쓰고 또 고쳐 쓰고. 특히 황당한 건 소지품 신고와 검사다. 손수건, 양말 한 켤레까지 정확히 적어내야 했다. 하나라도 수량에 차이가 있으면 서류작성부터 다시 시작. 몇몇은 저 멀리 따로 불려 가방을 열고 정밀수색(?)을 받았다. 대표팀은 여기서 육류·해산물을 담은 박스 3개를 반입 못했다. 와인에 잰 고기였는데 아깝지만 인정한다. 사전 신고가 필요했다더라. 다행히 김치나 밑반찬은 무사히 통과됐다. 오후 6시 40분 버스에 탑승했고 경기장으로 출발!

그런데 웬걸? 시속 30킬로쯤 되려나? 빨라야 50킬로 이하다. 다른 차들이 없는데 거북이 운행은 뭐람? 결국 50분이나 걸렸다. 일정이 조정됐다. 공식기자회견이 오후 7시55분 시작됐다. 참석자는 북한기자 5명뿐. 팀 훈련은 오후 8시25분 시작돼 9시15분 무사히 종료됐다. 예정대로라면 오후 6시40분 회견, 오후 8시 훈련이 끝났어야 했다.

고행은 계속 됐다. 버스 출발이 또 늦어졌다. 시동조차 걸지 않았더라. 밖을 보니 그냥 고요하다. 스산한 풍경은 무관중 경기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숙소인 고려호텔까지의 이동은 15분 남짓이었다.

뒤늦은 체크인과 방 배정, 저녁식사. 메뉴가 기억나진 않는데 이것저것 부족했다. 특히 메인요리인 닭고기는 두어 명이 접시에 담아가면 없어질 양이었다. 한국에서는 듬뿍 음식을 퍼오곤 배부르면 버렸는데, 풍족한 삶을 살았구나 싶다.

● 결전의 날(15일 오전)

잠자리는 썩 편하지 않았다. 음산한 기운도 들었다. 누군가는 무서워(?) 전등을 켜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인 호텔 로비로 향했다. 밝게 인사했는데 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머쓱하다 못해 불쾌하다. 숙소 3개 층으로 나뉘어 투숙한 우리 선수단 이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식당의 음식은 부족했다. 그래도 경기가 있어서인지 정체 모를 고기(쇠고기 추정)가 나왔던 것 같다. 우리와 동행한 조리장이 정말 고생했다. 없는 재료를 잘 찾아 국과 전골을 끓여줬다. 사실 호텔이 조리장의 주방 출입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단다.

외출이 간절하지 않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간 보내기’였다. 사실 호텔에서 외국인들에게는 인터넷 사용을 허락하는 것 같았다.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되는 데 우리에게는 정말 까다롭게 굴었다. 당연히 구입할 수 없었고 어렵사리 대여한 유선 랜은 속도가 느렸다. 그나마도 일일이 검열을 당했다고 한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 황량한 경기장, 뜨거운 피치(15일 오후)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 선발대가 오후 1시30분 출발했고, 본진은 킥오프(오후 5시30분)에 맞춰 출발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조금 이상하다. 티켓부스도 없고 아무도 없다. 뭔가 숨기고 있다. 킥오프가 한 시간 남았는데 관중석에 군인만 있고, 의료진이 경기장 입구에 배치됐을 뿐이다. 오후 5시, 확신이 섰다. 무관중이다.

경기는 정말 치열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이건 축구가 아냐”라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갑자기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데 무시무시했다. 온갖 폭력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난무했다. 부상도 우려됐다. 의료수준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이 더욱 불안했다. 심판도 정신없었다. 여기저기 뜯어말리느라.

경기력은 우리가 앞섰다. 북한은 그냥 달려들고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달라붙는 패턴의 반복. 0-0은 아쉽다. 북한 선수들은 종료휘슬이 울리자 우승이나 한 것처럼 얼싸안고 기뻐했다. 경기 후 공식행사도 조촐했다. 무의미한 기자회견에는 ‘경기 소감’만 질문으로 나왔을 뿐, 방송 카메라도 텍스트 취재진도 없으니 믹스트존이 운영될 리 없었다.

● 집으로(16일)

북한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야 조금씩 입을 열었다. 안타까워하던 우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비긴 것에 굉장히 만족해하고 있었다. 일부는 “우리(북한) 움직임이 어떠냐?”, “경기 결과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 따위의 질문을 던지곤 했다. 우리가 떠나려 하니 호텔에 중국인 단체손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순안공항에 다시 왔다. 입국 때와는 달리 출국수속은 마냥 늘어지지 않았다. 베이징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려고 탑승구로 향하는 데 누군가 “야∼호”를 외친다.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도 함께 크게 웃어줬다. 서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많이 억눌려 있었던 것 같다. 베이징에 도착해 맡겨놓은 휴대폰을 돌려받으니 비로소 진짜 자유가 찾아왔다.

정리|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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