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12〉선상의 탁구 결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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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상선은 국적선과 송출선으로 나뉜다. 국적선은 한국 선주가 운항하는 선박이라 한국 항구를 모항(母港)으로 하므로 매달 한 번은 우리나라에 기항한다. 송출선은 외국 선주가 운항하는 선박이라 한국에 기항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1980년 후반에는 당시 승선계약에 따라 최소 10개월은 승선해야 휴가를 올 수 있었다. 그 기간을 어찌 바다 위에서 보낼 것인가. 몇 년 승선생활을 하다 보면 선원들은 각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체득한다. 하루 당직 8시간, 잠자는 8시간을 빼면 8시간이 남는다. 배는 좁고 육지에서처럼 외출을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나는 TV 연속극을 담은 비디오를 보거나 신동아 같은 월간지를 보며 무료함을 달래곤 했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운동을 열심히 하는 선원도 많았다.

배에서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역기, 탁구, 골프 연습 등이 있었다. 골프와 역기는 혼자만의 운동이라서 다소 심심하다. 당시 배 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운동은 탁구였다. 여러 명이 같이할 수 있고, 몇 시간이고 즐길 수 있다. 나는 매일 점심을 먹고 1, 2시간씩 동료들과 탁구를 쳤다. 단식도 있고 복식도 있었다. 내기를 해 맥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배에서 마시는 맥주는 면세품이라 아주 저렴했다. 나는 탁구를 제법 잘 치는 편이어서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다. 배에서는 누가 실력자인지 금방 알려지고 이내 인기를 끈다. 신참이 승선하면 그 사람이 탁구를 얼마나 잘 치는지가 선원들의 관심사였다.

외국 항구에서는 정박 중인 다른 선박과의 대결도 벌어진다. 일본의 어떤 항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항해 중 우연히 전화통화를 하면서 알게 된 한 선박의 1등 항해사가 탁구경기를 제안했다. 자기 배에는 실력이 수준급인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나도 우리 배에 선수들이 많다고 큰소리쳤다. 결국 경기가 성사됐는데 막상 나와 함께 갈 선원들이 없어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게 됐다. 나를 초대한 그 항해사는 “우선 우리 배의 6등 실력자와 게임을 해보라”고 했다.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경기에서 이겼고 5등, 4등, 3등도 차례로 무너뜨렸다. 경기 내내 상대방 선원들의 응원 소리가 시끌벅적했다. 다음 상대는 마침내 그 1등 항해사였다. 그는 돌연 “다음에 하자”며 경기를 접었고 게임은 그렇게 끝났다.

승자에 대한 예우도 톡톡히 받았다. 그 선박은 알래스카에서 잡은 연어를 운반하는 어획물 운반선이었는데 연어를 몇 마리 나에게 줬다. 우리 배로 복귀한 나는 선원들과 함께 떠들썩한 연어 파티를 벌였다. 일본 선박에서의 탁구경기 스토리를 들은 우리 선원들은 박수 치며 나를 치켜세웠다. 선원들이 나를 제법 잘 따르게 된 배경에는 탁구의 영향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몸놀림이 빠르고 경쾌하다고 한다. 이는 배에서 10년 동안 친 탁구 덕분이다. 선상에서 즐긴 탁구는 이렇듯 나로 하여금 리더십을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장차 육지에서 수십 년을 살아갈 체력도 길러준 취미생활이었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탁구#선박#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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