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권재일]우리말과 우리글의 위상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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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일 국립국어원 원장
권재일 국립국어원 원장
5월 문화체육관광부 의뢰로 실시한 어느 조사에 따르면 한글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 37%나 된다고 하여 믿어지지 않았다. 국경일인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단정할 수야 없겠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 한글날이 그만큼 잊혀 가는 듯하여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올 한글날은 마침 휴일이니 우리 모두 차분히 한글 창제의 소중한 뜻을 되새겨 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대중문화 보급이 확산되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어능력시험에 응시하는 외국인 수가 처음 실시한 1997년 2000여 명이던 것이 2010년에는 11만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한국에 취업하기 위해 필요한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 응시자는 무려 17만여 명인 것을 보면 외국에서 우리말을 배우려는 열기가 정말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007년 제43차 세계지식재산권기구 총회에서 우리말이 국제공개어로 채택돼 우리말로 국제특허를 제출하거나 특허 내용을 열람할 수 있게 됐다. 6월 헝가리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외교장관회의에서는 우리말이 동시통역어로 선정돼 우리말이 이제 국제어로 한 걸음 다가가게 됐다.

한국어시험 응시 외국인 17만명 넘어

우리말뿐만 아니라 한글의 위상도 대단하다. 한글은 창제한 사람, 창제한 날짜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으며 창제한 원리를 적은 기록이 전해오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글자다. 그 기록인 ‘훈민정음해례’는 국보 70호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랐다. 이것만으로도 참으로 자랑스러운 글자다. 이러한 한글이 이제 세계 속으로 보급되고 있다. 2009년 인도네시아의 한 소수민족 언어인 찌아찌아말을 한글로 표기하게 된 것은 우리말이 아닌 다른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됐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었다. 이달 초에는 볼리비아의 아이마라족에게 그들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한글을 보급할 협약이 맺어졌다. 창제 원리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배우기 쉬운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우리만의 글자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는데 한글이 드디어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한글 보급이 성공적으로 이어진다면 장차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한글을 지구촌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쓰는 길이 열릴 것이다. 또한 문맹 타파라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념을 널리 펼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 밖에서는 우리말과 우리글이 그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데, 나라 안에서는 어떠한가. 행정기관에서 쓰는 용어가 어렵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다. 행정기관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언어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직접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훨씬 더 쉽고 정확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책 이름, 공문서, 보도자료에 불필요한 외국어나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말을 섞어 쓴 일은 없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힘내自! 중소氣UP, 공공구매路’라는 어느 행정기관의 구호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에서나 볼 수 있는 한글 파괴처럼 우리말 표기를 아예 무시했다. 며칠 전 열린 세계소리축제의 주제는 ‘이리 오너라 up go 놀자’이며, 어떤 공공기관이 마련한 복고풍(復古風)의 대중가요 행사는 ‘福GO 클럽’이란다. 또 다른 행정기관에서는 도무지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마더 세이프’, ‘워킹 스쿨버스’, ‘행복e음’, ‘잡월드’라는 정책 이름을 내세우고 있어 무슨 정책인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 국립국어원이 알기 쉬운 말로 다듬어 적극적으로 권유해 보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시큰둥하다. 국민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국립국어원에서 초중고 학생들의 언어 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대화 자료를 살피다 보면 정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일상 대화 속에 욕설과 비속어, 그리고 인격을 모독하는 표현이 가득하다. 이들의 언어를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 보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는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을 찾았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관심을 가질 때 상당히 순화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부모들이 자기 자녀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는데, 믿고 싶더라도 한 번쯤 자기 자녀의 언어습관을 관심 있게 살펴보는 노력을 한다면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효과가 클 것이다.

자부심 갖고 품격있는 언어생활 해야

청소년의 언어 순화를 위해 방송의 노력도 중요하다. 방송은 특성상 사회의 생생한 언어 그대로를 반영한다 하더라도 언어예절이 실종되고 막말과 비속어가 일상화된 품격 없는 말을 오락 프로그램에서 계속 내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적어도 청소년들이 이런 언어 환경에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

한글날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쉽고 정확하고 그리고 품격 있는 언어생활을 위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권재일 국립국어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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