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1>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 입력 2009년 2월 5일 02시 45분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신명호 지음/돌베개

《“한국사에서 현대사와 조선왕조의 단절 과정은 행복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왕실 문화의 연구, 정리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유구한 역사 속 우리 조상들이 창조했던 수많은 문화 중에서도 왕실문화는 그 정수에 해당한다.”》

잊혀진 왕실문화 한눈에

이 책은 조선의 왕실문화 면면에 대해 두루 다루고 있다. 사학자인 저자는 일제 식민통치 극복 과정에서 조선왕조와 단절된 우리에게 왕실문화는 “이해되고 계승되어야 할 대상보다 속히 극복하고 망각해야 할 그 무엇”이 돼 버렸다고 지적한다. 이어 저자는 사적으로는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이면서 공적으로는 국권과 정통성을 상실하는 조선 왕실의 문화를 다양한 사료,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해냈다.

왕의 일과는 새벽을 알리는 파루(왕이 하늘을 대신해 조선의 백성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왕이 밤을 보내는 침전은 왕의 사적인 영역이지만 그곳만 벗어나면 그는 절대 권력자로 상징화된다. 침전 주변에는 지밀상궁(왕을 지척에서 모시는 상궁)을 비롯한 시종들이 있다. 준비를 마치면 외전으로 가는데 침전의 정문 바깥으로 가는 순간부터 왕은 준비된 붉은색, 푸른색 가리개로 가려지며 호위병들의 경호를 받았다.

왕이 면담하는 양반 관료들은 모두 꿇어 엎드린 채 말을 해야 했는데 왕의 얼굴을 보고 싶을 때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약 마음대로 왕을 쳐다보면 중벌을 받았다. 연산군 때 심순문이란 문신은 연산군을 마주보고 왕의 옷소매가 좁다는 말을 했다가 불경죄로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왕들에게도 인재를 뽑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은 중요했다. 문과의 경우 3차 시험에 해당하는 ‘전시’는 대궐에서 치러졌으며 문제도 왕이 직접 출제했다. 주로 국정 현안에 대한 대책, 시 등이 문제로 출제됐다고 한다. 왕은 아침 8시경 문과 전시장에 나타났으며 해가 지기 전까지 시험이 계속됐다. 이 밖에도 반차도로 보는 어가행렬, 어가행렬의 깃발 종류, 왕의 예복과 수라상 등에 대해 사료와 그림 분석을 통한 해설이 덧붙었다.

왕비의 경우는 국모가 되는 과정부터 복잡다단하다. 왕비 간택을 위해서 국가에서는 10세 전후 처녀들의 혼인을 금하는 ‘금혼령’을 내렸다. 전국 사대부 가문에서는 처녀의 사주단자와 함께 집안 이력을 기록한 신고서인 ‘처녀단자’를 나라에 올렸다고 한다. 이 중 금혼령의 예외가 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씨 성을 가진 자, 대왕대비의 동성 5촌 이내 친족…부모가 모두 생존하지 않거나 한 명만 생존한 자’ 등이었다. 사대부 가문에서는 앞날에 대한 불안 등으로 처녀단자를 올리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세 번의 간택 뒤 이어지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국모가 된 왕비의 생활은 어땠을까. 사진 자료와 그림으로 살펴보는 왕비의 예복, 백옥립봉잠, 마리삭금댕기 등의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머리 장식은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밖에도 왕세자와 후궁들의 일상, 이들의 삶의 터전인 궁궐, 조상들을 모시는 왕실의 의례, 조선왕실의 독특한 기록문화 등도 함께 실려 있다.

교과서뿐 아니라 사극, 역사소설 등을 통해 익숙하게 접해 왔음에도 실제로는 잘 알지 못했던 궁중 문화의 요모조모를 소개했다. 이 시대 수많은 장인과 지식인의 노력으로 완성됐을 왕실문화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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