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야인시대' 김두한 육성 테이프 공개

  • 입력 2002년 10월 8일 13시 20분


SBS 드라마 ‘야인시대’는 요즘 1930년대 김두한이 종로 일대의 주먹 신마적과 한 판 끝에 그를 제압하고, 바야흐로 구마적과의 일대 승부를 남겨 놓고 있다. 거지소년에서 종로의 ‘오야붕’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이 시기를 김두한 자신은 어떻게 회고할까.

김두한은 1969년 10월14일부터 1970년 1월26일까지 옛 동아방송 인기 대담 프로였던 ‘노변야화’에 출연해, 종로 주먹에서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 인생역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야인시대’ 작가인 이환경씨도 김두한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와 함께 동아방송 녹취를 참고해 드라마를 집필했다고 한다. 60분짜리 테이프로 22개 분량의 방대한 육성자료 중 종로 우미관 뒷골목 생활, 일본 야쿠자와 겨루던 이야기 등 김두한의 소년시절과 청년기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어 본다. 대담은 당시 동아일보 권오기 논설위원(전 동아일보 사장·전 통일부총리)이 했다.

-어떻게 거지생활을 하게 됐습니까?

 [김두한 육성녹음]소년시절 걸어온 이야기('69 동아방송 '노변야화' 중에서)

“여섯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님을 만나고 이듬해 일곱살 되던 해에 왔죠. 아버님은 저를 키워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정세가 워낙 험했어요. 한국 사람으로 가장한 일본 압잡이들이 들어오고 마적이 들끓고 러시아 적화 바람이 불고, 너무 위험하니까 씨앗이라고 저 하나밖에 없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신 거죠. 그런데 제가 여덟살 적에 고아가 됐어요. 아버지가 독립군 총사령관이니까 혹시라도 밀정 노릇을 할까봐 할머니 어머니를 예비 검속했어요. 일정 때는 재판도 안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내까려뒀단 말이야. 그 사이 외삼촌이 집 팔고 땅 팔아 먹고 하니까 여덟살짜리가 하루 아침에 거지지. 종로 장차구(지금의 광교)다리 밑구녕에서 고아로 성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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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도움으로 거지 생활을 면하셨다면서요?

“아버님이 형평사라고 소백정조합 초대회장을 하셨잖아요. 당시 이들은 사대문 밖에서만 살 수 있었는데 아버님이 안동 김씨들한테 돈을 받아 이들에게 수만원씩 줘서 낙원동 인사동에 푸줏간을 내줬어요. 그때 형평사 부회장 하던 원씨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아버님보다 30년 정도 위였죠. 그 분이 지금 종로구청 자리, 바로 건너편에 사동옥이라고 설렁탕집을 했거든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밥 좀 주세요’ 했는데 이 양반이 돈을 받다 말고 저를 가만히 쳐다봐요. 그리곤 버선발로 튀어나왔어요. 너 두한이 아니냐, 제가 두한입니다. 그랬더니 저를 붙들고 흐느껴 우는 거에요. 그 길로 날 끌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깎고, 그 사이 양복을 벌써 사오셨어. 목욕탕에 데리고 가더니 할아버지가 손수 씻겨요. 그렇게 원노인 밑에서 17세까지 성장한 거에요. 노인은 19세에 돌아가셨지.”

-소학교 2년까지만 다닌 것으로 아는데 왜 원노인이 공부를 시키지 않았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죠. 공부를 많이 하면 조국보다 자기가 편히 살고 싶어져서 친일파가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일사상이 빨리 온다는 것. 제가 김좌진 장군의 일점 혈육인데 반일하면 자칫 혈통이 끊어진다, 그러니 공부하지 말고 운동만 하라고 하신 거죠.

-단순히 힘이 세다는 것만으로 주먹대장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요.

“열여덟살 때부터 사동옥 맞은 편 조선극장 옥상에 샌드백을 갖다 놓고 뒷발질로 때리는 연습을 했죠. 한 길쯤 해놓고 발길로 차고, 그 다음에는 조금 더 올리고 한 길 반이 올라가고 나중에는 완전히 두 길을 뛰었죠. 발길질은 주먹보다 5배는 탄력이 있거든요. 열여덟살 때 키는 다 컸죠. 체격은 25관이지. 샌드백은 내 중량보다 무거운 것을 쳤어요.

요즘 깡패들처럼 무기를 쓰는 게 아니라 순전히 주먹으로 했거든요. 제가 아버님의 좋은 체격을 타고났어요. 다음은 담력이에요, 암만 힘이 세도 겁이 많으면 안되거든. 간땡이가 강철같아서 겁이 없어야지. 담력 있고 용맹 있고 날래고 그러니까 무적이죠. 싸움을 잘 하는 사람한테는 권투고 레슬링이고 당수고 유도고 간에 안돼요. 제가 한 번 나가면 20명 30명씩 때렸거든.

-본격적인 우미관 뒷골목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죠.

 [김두한 육성녹음]우미관 시절 이야기('69 동아방송 '노변야화' 중에서)

“구마적과 신마적이 장악하고 있었어요. 구마적의 기운이 얼마나 센지, 자동차 바퀴가 터지면 왼손으로 차를 들고 바른손으로 담배 한 대 피우면 그 사이 빵꾸 떼우고 턱 놔요. 손가락으로 잣을 깨고 동전을 깨고 그랬거든요. 그 사람한테 떡 붙잡히면 다룽다룽 매달렸다 죽거든요. 그때 제가 신진으로 자라고 있었죠. 구마적과 신마적을 잡지 않으면 종로 협객사회에서 ‘오야붕’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선배니까 대중 앞에서 때릴 수는 없고 그래서 조선극장 뒤 넓은 터로 불렀죠. 10시쯤 극장이 파한 뒤에 갔어요. 형님에게 충고를 하겠는데 ‘싸움이라는 것은 자기보다 센 사람을 때려야지, 아침밥도 못먹는 아이들 극장에서 거적떼기 깔고 자는 아이들을 꽝꽝 치니 후배도 선배를 존경할 수 없어, 내가 당신을 좀 때려야겠다’ 했지. 휙 뜨면서 두 발로 안면을 내질러버렸는데 내가 25관, 구마적이 30관이니 55관이 부닥치니까 푹 거꾸러질 것 아니오. 일어나는 것을 눈과 코 있는 데 급소를 쳤거든. 종로통을 장악하고 목포, 전주, 광주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휩쓸어 스무살 때 전국의 ‘오야붕’이 된 거죠.”

-일본 야쿠자와 싸운 이야기도 유명하던데.

 [김두한 육성녹음]일본 야쿠자와 겨루던 이야기('69 동아방송 '노변야화' 중에서)

“지금 충무로 1가에서 5가까지 그들이 살았죠. 건축토건업, 곡마단, 영화, 흥행, 도박 등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지금 시민극장 건너편에 아사히 비루 회관이 있었죠. 그곳에 정복수 등 조선출신 권투선수 5명과 술을 먹으러 갔어요. 그 회관에는 모두 일본여자들만 있었는데 권투선수들이 왔다고 무척 좋아했거든요. 이걸 본 일본 하야시 패들이 아니꼽다며 우리 쪽으로 접시를 던졌어요. 저쪽 패들은 단도를 가지고 있거든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 하고 나섰죠. ‘한번 싸울까’ 했더니 8명이 빙 둘러싸는 거에요. 단도 들고 빙 둘러쌀 때 가운데로 척 들어가는 것은 기운이 세서 하는 게 아니에요. 간땡이가 크지 않으면 안돼요. 그때 푹 찌르면 죽잖아요. 쓱 들어갈 때 벌써 제 바른발에 한 놈이 떴어요. 다시 빙 돌며 갈기니까 또 한 놈이 떠버렸거든. 6명이 남았잖아요. 한번 연습해 보시오. 상대가 칼 들고 날라 들어오는 것을 쓱 비키면서 발로 탁 치면 상대의 몸이 빙 돌아요. 옆으로 빠지는 듯하면서 왼발로 옆구리를 탁 치면 끽 하고 쓰러지거든. 6명이 뻗었지. 그때 순사들이 호루라기 불고 막 올라와요. 일본 사람들 깨끗한 면도 있어요. 싸움에 지니까 칼을 앞에 탁 갖다 놓고 ‘형님’하며 절을 하는 거에요. 일본촌 일대에 종로통의 곰보딱지 긴또깡이 일본여자 50명과 순사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칼 잘 쓰는 8명을 물리쳤다고 소문이 났죠.

그후 일본인들이 하는 도박판에 갔습니다. 내가 중간 오야붕을 만나 한 달에 500원씩 보내줘야 겠다고 했죠. 싫으면 한 판 붙자. 하지만 비겁하게 일본도나 곡괭이 들고 오지 마라. 단도까지는 괜찮다. 남자라고 할 때 내가 맨손이면 너도 맨손으로 해야지 하면서 장충단에서 아침 6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조선과 일본이 한 판 싸운 셈이네요.

“전라도 광주 출신 유도 4단 김무옥과 상해 직업권투선수 출신인 문영철 등 6명과 함께 갔어요. 저들이 일본도를 가지고 올지 모르니까 우리는 파이프를 준비했죠. 손잡이에 고무를 감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가죽장갑 끼고, 배에다 호스를 둘러요. 세 겹을 감으면 웬만한 칼로 찔러도 들어가질 않아요. 심장하고 복부만 맞지 않으면 되거든요. 광목 감듯 쭉쭉 감고 신발은 권투선수들 신는 것 같은 것으로, 그냥 신발은 벗겨지니까요. 제 직업이 싸움 아닙니까.”

안개 낀 새벽 장충단에서 하야시 패와 일전을 벌인 김두한은 수십명의 상대를 물리치고 그후 하야시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다. 하야시는 매달 1000원씩 김두한 앞으로 보내주었다.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담배 한 갑 10전 할 때니까 1000원이면 큰 돈이죠. 그 다음에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 같은 데서 100원, 50원씩 봉투에 넣어 보내왔는데, 당시 조선총독 월급이 1만원이고 제 수입이 2만7000원 정도 됐단 말이에요. 주먹사회의 무적이 된 거죠.”

-종로경찰서 마루오카와의 한 판도 유명하던데.

 [김두한 육성녹음]마루오카와의 한판 승부('69 동아방송 '노변야화' 중에서)

“마루오카는 종로경찰서 유도선생이었죠. 4단인데 일본 천황 앞에서 하는 의전시합에서 내리 4승을 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못살게 구니 마루오카와 한 판 붙어야겠는데 방법이 없어요. 일본 경찰 때리면 그대로 몇 년 징역일 테고. 그때 유도선수 출신인 김무옥에게 너 유도복 챙겨 들고 종로경찰서로 가서 마루오카와 시합을 해라 했죠. 무옥이가 ‘선생님 제가 배우러 왔습니다’ 하고 마루오카에게 한 달 동안 기술을 다 배워왔지. 사실 첩자가 된 건데. 무옥이와 사흘 연습하고 우미관 옆 술집으로 갔어요. 마루오카가 광교다리 백영상회 주인과 술을 마시러 왔거든요. 백영상회 주인이 변소에 왔을 때 일부러 따라붙어서 발을 꽉 밟습니다. 왜 밟느냐고 따지니까 길이 좁아서 그런 거지 누가 고의로 했어 하고 번쩍 들어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죠. 일부러 시비를 건 거지. 마루오카에게 나는 조선 사람이고 너는 일본 사람이니까 남자답게 싸우자, 내 팔다리가 꺾이거나 턱이 떨어지고 머리가 쪼개지더라도 서로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싸우자고 했어요. 경찰들이 새카맣게 모여들어 우리를 둘러싸요. 싸움은 한 방입니다. 두 번은 없어요. 마루오카가 들어올 때 왼쪽으로 쓱 빠져서 바른발로 정갱이를 냅다 치면서 빠져나갔어요. 아무리 철떡 같은 장사라도 발길로 정갱이를 치면 온 신경이 다 죽어요. 마루오카도 ‘아야’ 하면서 옆으로 쓰러질 때 목의 급소를 공격하고 공중으로 붕 날라 등을 확 찍었죠. 나중에 들으니 대학병원으로 실려갔다고 해요. 그 소문이 전국으로 알려졌지면서 ‘두한이, 두한이’ 하던 사람들이 ‘긴또깡상’이라고 깍듯이 부르게 됐습니다.”

-일본 헌병대와 싸워서 도망다닌 적도 있으시죠.

 [김두한 육성녹음]일본 헌병을 때려눕혀 구속('69 동아방송 '노변야화' 중에서)

“해방 6년 전이죠. 황병관이라고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레슬링 동양챔피언이 있었어요.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했죠. 그 친구가 여름방학 때 고향인 평양으로 가기 전에 서울에서 친구들과 만나 술을 먹으려고 종로3가 술집에 왔어요. 10평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술집인데 그곳에 일본 군인 3명이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길쪽으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어서 황병관이 변소로 가다 발등을 콱 찍은 거에요. 그냥 미안하다고 했으면 되는데 ‘아, 군인인가’ 했지. 당장 ‘뭐, 어째?’하면서 대위 1명과 중위 2명이 칼을 뽑아 들었죠. 가만 있으면 한국 학생들 다 죽이겠더라고. 그래서 두 발로 일본 헌병들을 차버렸지. 군인 때리면 즉결재판이에요. 황병관과 함께 그 길로 뚝섬에 있는 절 암자로 도망쳐서 석 달 숨어 지내다 나와보니 부하들은 모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더군요.”

김두한은 이 사건으로 결국 일본 헌병대에 끌려갔으나 기지 하나로 살아 돌아온다. 고문실에서 그는 일본 대위(수사과장)에게 “조선사람은 미국 사람이냐, 중국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천황폐하가 군인에게 칼을 하사할 때 적병의 목을 치라는 것이었지 같은 적자를 죽이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때 내가 헌병들에게 말로 참으라고 했다면 이미 일본 레슬링 선수인 황병관의 목이 잘라졌을 것이다. 선생 같으면 이 때 어떻게 말렸으면 좋았는지 조언을 해달라”고 해서 풀려난다.

-종로서 고등계 미와 형사와 악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김두한 육성녹음]'미와'형사와 겪었던 이야기('69 동아방송 '노변야화' 중에서)

“미와는 종료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는데 사상범만 취급했죠. 독립운동 하던 이 치고 그 사람한테 안 걸린 경우가 없어요. 어머니 할머니 계실 때 우리 집에 자주 왔으니까 그 사람이 나를 잘 알거든요. 그 사람이 제게 요시찰을 붙였죠. 8.15가 되자 내 머리 속에 딱 들어오는 게 미와였어요. 총으로 무장하고 미와의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남산 드라마센터 좌측으로 들어가면 세 번째 집이었죠. 갔더니 손주들만 있고 미와가 보이지 않는데 지하실이 수상했죠. 뒤져보니까 거적을 둘러 쓴 미와를 발견하고 붙들었죠. 끌고 나와서 남산 약수터로 데리고 가서 죽이고 파묻었습니다. 순국 선열에 대한 복수를 제가 했죠. 조금만 늦었어도 보따리 싸서 도망치려 했죠.”

위 내용을 비롯, 김두한의 육성 증언 무삭제판은 동아닷컴(http://www.donga.com)을 통해 연재한다.

정리 김현미 <주간동아>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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