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직장인 "골프도 일"…새벽4시 연습장으로

  • 입력 1999년 9월 5일 18시 45분


“남자 사회는 술 아니면 골프를 중심으로 돌아가요. 술은 마실 줄 아니까 골프를 배우는 거죠.”

골프가 중장년층의 고급 레저스포츠라는 인식은 사라졌는가. 20,30대 젊은 직장인들이 허리를 비틀어대는 모습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30대에 시작하면 싱글, 20대에 시작하면 이븐’이란 말도 그들을 부추긴다. 경기 기흥에 있는 삼성반도체는 3년전 회사 안에 60타석의 골프연습장을 만들었을 정도다. 골프는 에티켓을 배울 수 있는 신사의 스포츠라는 이유에서.

◆부러우면 나를 따르라

LG애드 AE 신재훈대리(32)의 책상에는 싱글기념패가 세 개 당당히 놓여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새삼 자신감이 솟는다.

“까마득한 회사 간부나 다른 분야 사람들과 다섯 시간씩 이야기하기가 어디 쉬운가. 사람 아는 게 재산이라는데.”

▽"한이라도 젊었을때"

그가 ‘입문’시킨 회사동료만도 벌써 열 명. 목요일쯤 되면 회사 안에서 골프 얘기가 오가기 시작하고 상사들은 그에게 와 주말에 나갈 ‘코스 예습’을 한다.

“골프는 재벌 2세만 하는 게 아니다. 술 몇 번 마시는 것 포기하면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미래를 위한 투자는 된다.”

남들의 ‘시간탓’도 그에겐 핑계로만 들린다. 재미붙일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연습장 들렀다가도 정시출근했다. 비디오테이프를 100개 넘게 보면서 숏게임 트러블샷 코스공략법을 집중연구했다. 부지런하고 도전정신이 있는 사람이 일이건 골프건 잘 한다고 믿는 그다.

정신수양도 단단히 했다. 처음엔 공 멀리 보낸다고 좋아했지만 차차 다음 타 읽는 법을 배웠다. OB내고 잘하면 더블보기로 막을 것을 욕심내다 ‘양파’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채 집어던지고 캐디탓 하다가 ‘나’를 돌아보게 됐다.

◆골프 권하는 사회

1일 오후 7시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동아문화센터 골프스쿨. 직장일을 마친 회사원들이 타석을 가득 매운 채 땀에 젖어 묵묵히 공을 때리고 있다. 수강생의 60% 이상이 30대. 대부분 ‘대화에 못 낀다’는 이유로 찾아왔다.

▽잘쳐야 대화도 잘풀려

‘만학도’인 증권회사 영업담당 천진관과장(37)도 한달 전부터 거의 매일 네 박스씩 치고 있다. 맘과 달리 왼팔은 자꾸 굽혀지고 허리와 새끼손가락도 아프지만 필드에 나갈 날을 고대하면서 맹연습중.

“내 몸을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못 할 거다. 골프는 ‘일’이다. 고객을 만날 때 경제 얘기는 딱딱하고, 편하게 할 얘기가 골프밖에 없다.”

직장인 골퍼들은 한결같이 “어차피 배워야 할 것, 젊을 때 차근차근 배워야 돈도 적게 들고 덜 창피하다”고 충고한다. 40대후반의 모은행 지점장은 틈만 나면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부하직원들에게 골프용어와 전략을 강의한다. 상사의 ‘지원금’을 받아가며 반강요로 연습장에 출근하는 직원도 있다. 40대이상이 ‘재미’로 여유있게 시작했다면 20, 30대는 ‘필요’에 의해 절박하게 입문하는 것이 차이점.

이들은 선배세대처럼 무작정 팔만 휘두르며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영어골프책까지 뒤져보는 학구열로 이에 보답한다. 상사가 공 날린 방향으로 ‘정확하게’ 보내 나란히 걸어다닐 만큼의 실력은 갖추기 위해.

◆골프는 새 밀레니엄의 전략?

젊은 골퍼들은 골프를 통해 장래 경영자로서의 리더십과 새 밀레니엄시대에 필요한 전략, 살아남을 수 있는 자질을 키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생존' 위한 필요 조건

미국유학하고 온 현대증권 국제기획팀 이성엽씨(29). 대학 안에 한라운딩에 18달러만 내면 되는 18홀짜리 골프코스가 있는 환상적인 환경에서 핸디 8안팎의 실력을 닦았다.

“무조건 공을 때리는 게 아니라 전략이 필요하다. 위기상황에서 벌타를 적게 먹고 점수를 덜 까먹으면서 그 홀을 빨리 벗어나는 능력은 경영자의 자질과도 맞닿아있다. 성격이 급한 사람, 위기에서 당황하는 사람, 망친 홀을 잊지 못해 다음 홀까지 영향받는 사람…. 골프에선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골프한다는 말을 ‘조직’밖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있는 사람’들의 사치라거나, ‘설마 제 돈 내고 치겠느냐’는 부정적 인식이 있기 때문. 그래도 ‘그들’은 골프를 친다. 왜? 필요하니까!

〈윤경은기자〉ke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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