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소스 인공호흡기[횡설수설/김영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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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에 감염돼 지난달 20일 응급실로 향했던 벨기에의 쉬잔 호일라에르츠 할머니(90)는 인공호흡기 사용을 거절했다. “이미 멋진 삶을 살았다. 호흡기를 젊은이에게 사용해 달라”고 했고 이틀 뒤 세상을 떴다. 이탈리아의 돈 주세페 베라르델리 신부(72)도 인공호흡기를 젊은 환자에게 양보한 뒤 숨을 거뒀다. 인공호흡기는 코로나19 감염자의 생사를 가르는 핵심 의료기기인데, 절대적인 수가 부족하다. 의사가 어느 환자를 살릴지 고르는 상황까지 왔다.

▷인공호흡기는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산소가 더 필요한 순간에 더 많이 공급하고, 덜 필요할 때 줄여주는 퍼지(fuzzy) 기능이 있는 민감한 장치다. 코로나19 대응에 필수적이다. 실제로 각국의 치명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치명률이 11%인 이탈리아가 보유한 인공호흡기는 3000여 대로 인구 10만 명당 8.3대에 불과하다. 치명률이 1%에 불과한 독일은 10만 명당 30대를 보유하고 있다. 치명률이 1.5%인 우리는 9800대로, 10만 명당 19대다.

▷미국 내 확진자가 급증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6·25전쟁 때 만든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해 제너럴모터스(GM)에 인공호흡기 생산을 명령했다. 영국은 롤스로이스, 프랑스는 푸조와 시트로엥을 독려해 인공호흡기 제작을 검토 중이다. 차 엔진에 흡입배기 기관이 있어 인공호흡기와 비슷한 데다 차 생산 업체들이 대규모 조립 라인을 갖춘 점이 고려됐다고 한다.

▷자동차 업체들은 기존 제작 업체와 협업을 택했다. GM은 벤텍라이프시스템과, 포드는 GE 헬스케어와 손잡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한 달에 1만∼2만 대를 생산해도 최대 74만 대가 필요한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수요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탈리아는 동물용 인공호흡기를 활용할 수 있을지 검토할 정도다.

▷매사추세츠공대(MIT)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MIT는 ‘E-벤트(긴급 인공호흡기) 팀’을 만들었다. E-벤트 팀은 10년 전 프로젝트를 꺼내 디자인을 수정한 뒤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하는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3차원(3D) 프린터 등을 이용해 간단하면서도 안정적인 인공호흡기를 보다 빠르게 제작하기 위해 집단지성에 호소한 것이다. 자동차 업체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인공호흡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내게 되고, 기존에 3만 달러(약 3700만 원) 수준인 인공호흡기 가격을 500달러로 낮출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진다. 부디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돼 의료 인프라가 열악한 곳에서도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김영식 논설위원 spear@donga.com
#코로나19#인공호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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