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124>고고(孤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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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孤高) ― 김종길(1926∼2017)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밤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밋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12월에는 김종길 시인의 시 ‘성탄제’를 빼놓을 수 없다. 산타 할아버지의 옷보다 더 붉고, 선물보다 더 고마운 아버지의 사랑이 ‘성탄제’에 담겨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김종길의 또 다른 명편 ‘고고’ 역시 겨울의 작품이다. ‘성탄제’가 깊게 뜨거워지는 시라면, 시 ‘고고’는 높게 차가워지는 시다. 사람은 모름지기 뜨겁게 사랑하되 고고하게 높아져야 한다는 뜻인 걸까.

물론 시인은 이런 메시지를 위해 두 편의 겨울 시를 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김종길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꾸만 ‘성탄제’와 ‘고고’가 겹쳐져서 생각된다. 생전의 그는 어린 후학에게도 존대하고 예의를 지키는 분이었다. 원고를 부탁하면 원고지에 직접 글을 적어 우편으로 전하는, 그러면서도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분이셨다. 만날 때마다 ‘저런 분을 어른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사람의 품위란 무엇일까 생각하며 ‘고고’를 읽는다. 시에는 정좌하고 앉은 북한산이 우뚝하다. 신록과 단풍을 털어내고 원래 모습 그대로 솟은 산이야말로 기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겉치레와 허세가 난무하는 세상에 이렇게 고고한 사람, 즉 어른들이 많아질 필요가 있다. 그 좋은 본보기였던 시인은 지난봄에 별세하고 없지만, 시가 남아 사람의 고고한 품격을 지지하는 듯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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