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2030女, 프라이드를 입다

  • 입력 2006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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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의 패션에디터 강주연 씨는 패션은 꿈이라고 말한다. ‘꿈의 세계’를 다루는 그녀에게는 열정이 있다.
엘르의 패션에디터 강주연 씨는 패션은 꿈이라고 말한다. ‘꿈의 세계’를 다루는 그녀에게는 열정이 있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오른쪽) 씨에게 파티는 놀이이자 비즈니스다. 사진 제공 서은영 씨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오른쪽) 씨에게 파티는 놀이이자 비즈니스다. 사진 제공 서은영 씨
“어떻게 나를 40분이나 기다리게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아름다웠다. 화가 나 동그랗게 치뜬 눈망울, 그런데도 물기를 머금은 듯 반짝인다. 긴 생머리에 균형 잡힌 몸매. 코가 어색하게 높았더라면 ‘성형했겠지’라고 위안(?)이라도 삼았을 텐데.

“세상에 청담동 ‘하루에’를 몰랐다고요?”

이름만 듣고 일식집인 줄 알았다. 화려한 금색 주물 테두리에 짙은 붉은색 커튼이 달린 우아한 파스타 전문점인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정말 세련됐다. 가슴 부분이 살짝 파인 검정 레이스 톱과 몸에 붙는 스키니 진은 섹시했다. 단정한 진주 귀고리와 생머리는 절묘하게 청순했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37) 씨. 자타가 공인하는 청담동 패션 피플이다.

거리에는 그녀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동경하거나 혀를 차거나. 그래서 서 씨는 청담동이 좋다. ‘동지’들을 만날 수 있으므로.

‘쇼퍼홀릭’, ‘섹스 앤드 더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그녀들의 필독서다. 영미 소설로 ‘칙 릿(Chick lit)’이라 불린다.

패션과 소비에 탐닉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2030 여성을 주로 다룬다. 청담동 그녀들의 이야기이자 그녀들처럼 되려는 사회 초년생의 ‘고군분투기’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한 그녀들. ‘허영과 사치’로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그녀들은 백조 같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속으로는 쉼 없이 물갈퀴질을 한다.

‘한국판 칙 릿’ 속 그녀들의 일상을 엿봤다.

#1. 패션 피플(Fashion people)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들 하지. 그래도 결국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잖아. 무조건 명품으로 치장하는 ‘사치’와 나를 표현하는 ‘스타일’은 달라. 스타일은 노력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야.”(서은영)

“이태원 동대문을 뒤지다가도 이거다 싶은 명품엔 투자를 하는 거지. 결국 자기만족의 문제니까.”(강주연 엘르 패션 에디터·34)

“패션은 내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창조적인지 보여 주는 거야. 촌스러운 사람에게 예술 사진 맡기고 싶겠니?”(사진작가 보리·33-그녀는 평범한 흰 티셔츠를 뒤집어 입는 센스를 보였다)

브랜드 컨설팅회사 ‘브레인 파이’의 피현정(35) 대표. 손으로 만든 천연비누 ‘핸드메이드by파이’ 사업도 한다. “뉴욕 출장 마치고 새벽에 왔다”며 반긴다.

미키마우스 그림이 그려진 민소매 티셔츠와 헐렁한 청바지. 자연스레 드러난 군살 없는 팔은 미국 뉴욕 시 센트럴 파크를 달리고 온 뉴요커처럼 산뜻하다.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드리아는 에버크롬비(미국의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 티셔츠를 입고 수많은 프라다 패션 앞에서 기가 죽는다.

피현정은 그런 의미에서 프라다다. 앤드리아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녀들의 패션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미래에셋 3억 만들기 펀드’보다 ‘마놀로블라닉 100켤레 돌파’에 관심이 더 가고, ‘정상가보다 얼마나 싸게 샀는지’가 ‘얼마나 돈을 절약한 건지’로 통하는 세계다.

현정 씨는 아무리 야근해도 다음 날 화장은 완벽하다. 흐트러진 옷차림은 절대 금지. 오늘 입은 옷은 2주 후에나 입는다.

“첫 직장 면접에 탱크톱을 입었으니 말 다 했죠. 햇빛 좋은 날엔 빨간 원피스에 챙이 넓은 우아한 모자를 썼어요. 모자를 쓰고 앉아 일하는 제 모습에 다들 아연실색했죠.”

그녀는 독하게 일했다. ‘회사에 놀러 왔느냐’는 비아냥이 싫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두세 배로 일해야 ‘잘 한다’ 소리 한 번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옷을 튀게 입다 보면 남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이상한 스캔들도 끊이질 않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남들 따라 살면 내가 사라지는데.”

최소한 그녀 주위에서 챙 넓은 모자는 이제 ‘일벌레’의 상징이 됐다.

#2. 쇼퍼홀릭 (Shopahoilc)

“4시에 촬영 끝나고 5시까지 공항에 가야 했어. 그렇다고 비비안웨스트우드 샘플 세일에 안 갈 수 없잖아? 눈이 뒤집혀서 옷을 뒤지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나만큼 전투적으로 쇼핑 중이더군. 알고 지내던 잡지사 기자였어. 회사에서 몰래 나왔다나. 서로 쳐다보고 원 없이 웃었다, 정말.”(보리)

“‘이번 출장은 자라, H&M(중저가 여성의류)만 가자’고 매번 결심해. 근데 한국에서의 정가보다 30% 싼 걸 보고 어떻게 안 사겠어? 결국 신발 4, 5켤레는 기본, 옷 20∼30벌까지!!”(피현정)

“청담동 ‘화류계(우리끼리 이렇게 불러요)’ 생활 끝에 남는 건 옷밖에 없다는 말이 있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지만 월세 사는 사람도 있어. 이곳에 온갖 드라마가 있으니 ‘섹스 앤드 더 시티’ 외에는 TV를 안 보지.”(서은영)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는 월세 원룸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인다. 그녀가 가진 거라곤 통장 잔액 500달러와 마놀로블라닉 수백 켤레뿐.

캐리보다는 재테크 수준이 뛰어난 은영 씨. 그런 그녀도 구두만 300켤레가 있다.

올봄 전세로 이사한 그녀를 놓고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뭐하는 여자 같아?”

“이 이상야릇한 파티복을 봐선 유흥가?”

“맞아. 구두도 300켤레나 되더라.”

“그럼 한 트럭도 넘는 이 책들은?”

“…. 일이나 하자.”

은영 씨는 “독서가 취미인 게 다행”이라며 웃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벽장 속 구두를 보면 뿌듯하다. 언젠가 자신을 좋은 곳으로 이끌 것만 같다.

그런 그녀도 현장의 모습은 180도 다르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묶고 두꺼운 안경을 쓴다. 소설 속의 ‘B사감’이 따로 없다. 어시스턴트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늦게 자도 오전 6시면 일어난다. 완벽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녀는 스스로 ‘부지런함의 저주’라고 부른다.

70% 아웃렛 세일에 무너지는 현정 씨도 일할 땐 다르다.

전화 받을 때 절대 ‘여보세요’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일부러 짧고 무겁게 ‘네’라고 말한다. 용건만 간단히 하란 뜻이다. 귀엽고 착하다는 말은 질색이다.

#3. 사랑을 꿈꾸다

“서른다섯, 막막했어. 호주의 사막에서 산도르 마라이의 ‘유언’을 읽다 펑펑 울었지. ‘인정이 없는 여자도 아닌데 나는 왜 죽도록 사랑하지 못했을까’란 구절 때문에. 내가 무섭게 일만 했구나, 사랑을 해야겠구나.”(서은영)

“남자들은 버겁다고들 해. ‘내가 아픈데 너는 파티에 놀러 가냐’, ‘저 가방 매번 사주기 힘들겠다’고. 파티는 비즈니스고, 가방은 내가 사면 되는데 말야.”(피현정)

“너무 예쁜 비비안웨스트우드 블라우스가 있어. 근데 몸에 너무 껴서 숨조차 쉴 수 없는 거야. 두 번 다시 못 입었지. 아무리 좋아도 나에게 맞고 편하지 않으면 소용없어.”(서은영)

그녀들은 대부분 싱글이다. 한국적 관점에서라면 ‘노처녀’다. 강주연 씨만 결혼했다. “다행히 어릴 때 만난 덕택에 남편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소설이자 영화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 브리짓의 선택은 잘생긴 왕자 같은 휴 그랜트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브리짓을 사랑한 ‘미스터 라이트(Mr. Right)’ 콜린 퍼스였다.

그녀들 역시 찾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줄 짝을. 아무도 망사스타킹이 뭔지 모를 때 색깔별 무늬별로 신고 다녔던 자신들을 말이다.

한때는 결혼이 하고 싶어 구미에 맞지도 않는 패션에 도전했다. 현정 씨는 생머리에 다소곳한 정장, 이른바 ‘심은하 룩’을 해봤다. 은영 씨도 귀여운 공주 패션으로 남자들을 만나봤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 적도 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온전한 나로 살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도 사랑도 스스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어야죠.”(서은영, 피현정)

수많은 칙 릿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기작 ‘섹스 앤드 더 시티’. 그녀들 모두가 열광했던 시리즈를 끝맺으며 주인공 캐리가 했던 마지막 대사. 그녀들이 찾은 인생의 정답이다.

“가장 흥분되고 도전적이며 중요한 관계는 바로 나 자신과 맺는 관계다. 그리고 만약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게 된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That's just fabulous)”

글=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사진=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 성공파 2030女, 일-패션-소비에 열정적▼

최근 교보문고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책이 올랐다.

20대 초반 여성이 패션 잡지사에서 겪는 좌충우돌 사회생활 체험기를 가벼운 구어체로 풀어낸 미국 소설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최근 3주 동안 이 책을 구입한 사람 중 20, 30대 여성이 73.2%에 이른다.

미국에서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꼽혔으며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로 개봉돼 인기를 얻고 있다.

2030 젊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가벼운 구어체로 풀어낸 ‘악마는…’과 같은 소설을 칙 릿(Chick-lit)이라고 한다. 젊은 아가씨를 뜻하는 속어인 칙(Chick)과 문학(literature)의 합성어다.

1996년 영국 서점가를 휩쓴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칙 릿의 원조 격.

이후 여주인공의 색다른 직업, 패션, 쇼핑중독 등 흥미로운 소재가 가미되면서 일종의 문학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하이힐’, ‘초보자들을 위한 스시’, ‘쇼퍼홀릭’, ‘워커홀릭’, ‘섹스 앤드 더 시티’ 등이 있다.

미국 칼럼니스트 캔디스 부시넬의 섹스 앤드 더 시티는 드라마로 제작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국내에서는 패션계 인물들이 수필 형식으로 책을 내 2030 여성들에게 화제다. 올해 5월 패션모델 송경아가 ‘뉴욕을 훔치다’를 냈으며 스타일리스트 서은영과 모델 장윤주가 ‘스타일북’ 출간을 앞두고 있다.

출판평론가 한미화 씨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읽을거리는 18세기부터 있었다. 한때는 결혼, 한때는 직업여성이 되는 게 화두였다면 최근에는 일, 사랑, 성(性), 패션 등 다양한 관심사를 담은 게 특징이다. 이는 현재 젊은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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