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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삶·예술⑦]스승 존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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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삶·예술⑦]스승 존 케이지

입력 1999-06-17 19:24수정 2009-09-24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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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그토록 존경하던 외국인 스승 존 케이지는 음악에 관한 자기생각을 다음과 같이 옮겨놓았다.

“우리가 어디를 가던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대부분 소음이다. 우리가 소음을 귀찮아한다면 소음은 오히려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면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가를 드디어 알게 된다. 소음이야말로 경이로운 음악인 것이다. 가장 자연적인.”

현대음악사에서 존 케이지가 남겨놓은 실험정신은 언제나 반복적으로 거론된다. 케이지는 서양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18세기 악기가 내는 소리만을 음악의 영역으로 설정하는 고정관념에 대하여 반기를 든 가장 적극적인 전위음악가이다. 그는 전통악기 대신 우리 주변에서 찾아지는 플라스틱이나 심지어 새털 장난감 인형 등을 활용하여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종래 음악의 정의를 폭넓게 해체시킨 인물이다.

케이지는 음악을 ‘소리의 조직(Organization Of Sound)’으로 부르면서 기존의 음악과 소음을 동일한 음악의 영역에 놓았다. 또 전통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위주로 구성되어 음악을 계급화 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면서 공격적인 행위음악을 전개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백남준은 케이지와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다.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할 즈음, 백남준은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독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뮌헨대학 대학원의 음악과 석사과정에 응모하여 입학허가를 받아냈다.

독일에 도착한 56년, 백남준은 뮌헨대학에서 음악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오래갈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온통 작곡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이 음악사공부를 지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당시 준비중이던 안톤 베버른에 관한 음악사 석사학위논문을 중단하고 보수적인 뮌헨을 떠나 보다 전위적인 음악이 환영받던 프라이부르그로 옮겨버렸다.

그곳에서 백남준은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로부터 작곡의 기본에 관한 다양한 사항들을 수업하였다. 그러나 그를 지도하던 포르트너 교수 역시 백남준이 음가에 의한 전통적인 서양의 작곡수업보다는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이나 존 케이지의 음악에서의 소음에 관한 해석 등 최첨단의 전위음악에 훨씬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독일의 음악도시 다름슈타트에서는 매년 여름 휴가철이 되면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국제신음악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57년 백남준은 이 곳에 연사로 초청돼온 칼하인즈 슈톡하우젠과 만나 가까운 친지가 되었고 다음 해인 58년에는 존 케이지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예술인생은 큰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백남준은 일본 유학시절 도쿄대 음악교수이던 노무라 요시오와 음악평론가 쿠니하루 아키야마로부터 존 케이지라는 전위음악가가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아울러 케이지가 동양의 선불교사상을 활용하여 작곡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듣고 있었다. 동양에서 서양음악을 배우기 위하여 독일 땅을 밟았던 백남준으로서는 동양정신에 뿌리를 둔 케이지의 음악창작에 관하여 실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동양정신 운운하며 아는척하는 서양인들이야말로 대부분 아마추어이며 진정한 동양정신을 아는 서양인은 없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백남준은 매우 냉소적인 기분으로 케이지의 음악회에 들어갔다. 미국인이 과연 어떻게 동양의 유산을 해석할 것인가. 백남준은 케이지의 음악회에 관하여 70년대에 제작한 비디오작품 ‘텔레비전을 위한 백남준의 편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콘서트가 진행되면서 나는 서서히 케이지의 음악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콘서트가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백남준은 음악이 음가가 아닌 소리에 의존해야 한다는 기존의 음악적 사고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킨 케이지의 사고에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절대적 공허, 내적 통찰력을 통하여 들리는 소리, 옥타브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음악의 세계 등 적어도 동양인 백남준이 상상할 수 없었던 참선의 세계와 선의 음악을 케이지가 들려주었던 것이다.

이지는 백남준에게 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소음까지도 음악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때 음악은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이러한 사고는 바로 서양음악의 전통과 서양음악사를 뒤집는 것이며 그것이 동양의 선불교적 배경에서 창안된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케이지의 이러한 사고는 낭만주의음악이나 와그너, 미래주의음악, 쇤베르크, 그리고 케이지에 이르기까지 이미 20세기 음악을 통하여 꾸준히 논의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케이지는 현장의 최전방에서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백남준의 삶과 예술의 한 중심에는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몇 명의 스승이 있다. 그 가운데 신재덕과 이건우 김순남 등 백남준의 청소년기 한국인 스승이 있으며 외국인으로는 미국의 존 케이지가 있다. 백남준은 91년 이들 스승들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를 살려 ‘두 스승’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케이지와 신재덕을 주인공으로 등장시겼다. 또 90년에는 유일한 서양인 스승 존 케이지와의 만남을 극적으로 묘사한 비디오조각 ‘존 케이지’를 제작하였다.

작품 ‘두 스승’에는 신재덕과 케이지를 한 작품에 나란히 등장시킨 뒤 한쪽에는 “신재덕 선생이 양금을 탈 때 나는 침을 때때 흘리며 빽빽 꾹꾹…” 등의 익살스런 글귀를 써넣었다. 존 케이지를 서술하는 부분에는 영어단어 ‘새장’이라는 의미의 케이지를 살려 “케이지가 새장에 갇혔다(Cage caged)”는 짓궂은 글을 썼다. 청소년 시절 첫 피아노 선생인 신재덕과 예술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에 정신적, 사상적 디딤돌이 되어준 케이지를 가장 중요한 스승의 반열에 등록시킨 것이다.

작품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비디오예술을 상징하는 9대의 텔레비전 모니터와 작곡가 케이지를 상징하는 피아노부품, 레코드를 사용하여 인물을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케이지와의 만남을 강조하기 위하여 ‘운명적인 상봉’이라는 글을 작품 전면에 써넣었다.

93년 백남준이 대전엑스포에 참가하여 정보초고속도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을 무렵, 그는 미국에서 급한 전보를 한 통을 받았다. 존 케이지가 작고한 것이었다. 같은 미국의 뉴욕 땅에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말로만 스승으로 모시던 백남준에게 케이지의 서거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그는 국내 모 일간지에 실린 조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혁명하던 사람들도 그 혁명이 성공하고 나면 자기이익에 바빠 얼굴도 못 본 채 수년이 흘러간다. 핑계를 대다보면 한쪽에서는 벌써 늙어죽는다. 나는 또 어떤 사람의 얼굴도 못보고 그리워만 하게 될 것인가.”

이용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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