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작(요약문)]안토니아스 라인

  • 입력 1998년 1월 6일 20시 19분


핍박하고 핍박당하는 미만한 악의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마도 우선 싸우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굽은 손가락이 전쟁내내 레지스탕스로 싸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굽은 손가락은 단순한 행동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사유의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굽은 손가락이 보기에, 인간세는 고통과 무의미의 세계이다. 이러한 굽은 손가락의 고뇌와 관련하여, 영화를 보면서 내가 숨죽이며 지켜보았던 장면은 굽은 손가락의 제자이자 안토니아의 손녀인 테레사가 과연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고민에서 결국 출산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새로운 생명을 이 세계에 들어서게 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야말로 유일하게 삶의 조건 자체에 대한 판단이자 그간 살아온 세상에 대한 평가의 순간일 수 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어찌됐거나, 이 세상의 삶에 대한 긍정의 표시이다. 하지만 굽은 손가락은 테레사의 출산에 대해 반대한다. 세상은 지옥이며, 여기에 새로운 생명을 던진다는 것은 곧 태어날 누군가에게 고통을 부여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전제를 인정하는 한 그것은 너무도 논리적인 결론으로 보이기 때문에. 굽은 손가락은 논리적이기 이를 데없이 자신이 살아온 이 세상에 대한 판단을 아이를 낳지 않고 또 급기야는 자신의 생을 버림으로써, 실천으로 관철했다. 그렇다. 그는 정말 죽었다. 그에게 염세와 자살은 관념의 유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아네 사람들은 낳고 또 낳아, 가계를 이루었다. 세상의 짐승스러움에 대해 누구 못지 않게 잘 알았던, 안토니아의 그러한 삶과 세계에 대한 긍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게 그것은 안토니아가 씨를 뿌릴 때 배경을 이루던 그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였다. 이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있다. 자살하는 나뭇잎은 없다. 죽은 듯 떨어졌던 나뭇잎은 봄이면 다시 피어나게 마련이다. 생명은 자살하지 않고, 그렇게 저물어 갈 뿐, 그리고 후손을 다시 이을 뿐.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긍정은 무엇보다도 이성이라는 허공보다는 그 큰 자연의 일부로 우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아는 자는 우리의 삶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임을 알고 살아내는 자이다. 이렇게 보자면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나 자살하는 일은 자연과 보조를 맞추는 일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일이 된다.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마를린 고리스는 많은 장면들을 자연을 바탕으로 한 미장센에 할애하고 있다. 안토니아네 사람들은 그 자연을 등에 지고 밭을 일구고, 우유를 짜며, 꼴을 벤다. 그 자연 속의 모습은 놀랍게도 그 자체 의미로운 삶의 무늬처럼 보인다. 자연 속의 노동. 특히 영화에서 반복되는, 씨를 뿌리며 걷는 안토니아의 장대한 걸음걸이의 이미지는 인상적이다. 그리고 사계가 바뀌어가는 자연, 그 속에 서 있는 무심한 나무들. 전경으로 잡은 많은 자연의 모습들. 이러한 경우, 자연의 신은 관습적으로 영화언어에서 사용되는 두가지 용례, 즉 시간경과를 나타내는 인서트 셧이나, 그 자연을 바라보는 이의 심상을 대신 표현하는 셧,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연은 세상에 가득찬 악과 불온한 삶의 조건들을 견디어내며 나아가는 안토니아의 철학을 표상한다. 악, 고통,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견지되는 삶. 그것에 대한 대긍정을 가능케 하는 원리인 자연은 ‘안토니아스 라인’ 곳곳의 서브플롯들을 모두어내는 내적 원리로 기능한다. 일례를 들어 안토니아가 기독교의 경직된 형태에 대해서 비판할 때, 그녀가 긍정하는 것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의 건강한 욕망이다. 악, 고통, 우연을 넘어서 삶을 긍정하는 원리로서 자연, 건강한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대안적 삶의 태도를 제안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 본연으로서의 자연은 대안적인 삶의 형태를 추구하는 모든 시도에서 하나의 준거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것들은 원래 그러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억압적 인위의 소산으로 환원하고 대안을 추구하고자 할 때, 우리의 자연상태가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안토니아스 라인’에서는 가부장제, 억압적인 종교 등이 모두 그런 관점에서 재검토되며 흔히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동성애의 경우는 그것이 자연적일 경우 오히려 긍정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삶에 대한 대긍정의 원리, 비판과 대안의 원리로서의 자연은 마침내 우리 존재가 뿌리박고 있는 역사성의 환기에까지 이어진다. 안토니아는 영원히 죽는 것은 없다고 말하며, 그녀의 가계는 오래 지속된다. 이러한 존재의 지속으로서의 자연은 마침내 자신의 내포를 역사성에까지 확대한다. 왜냐하면 삶은 그렇게 지속되고, 그 지속은 누적되면서 역사적 차원을 얻기 때문이다. 마를린 고리스가 안토니아의 이야기를 누대에 걸친 가족사의 형태로 구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안토니아는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회식을 갖고 농부 바스와 함께 춤을 춘다. 거기에 교차 편집으로 안토니아의 지나간 세월들이 보인다. 놀라워라, 그 장면, 그러니까 그 지나간 시간을 보는 시점은 늙은 안토니아가 아닌 어린 증손녀 사라의그것으로되어있다. 영화에서, 안토니아는 당당하다. 밤만으로는 부족하여 대낮에도 꿈을 꾸고자 하는 자들은 오늘도 극장으로 향하여 마음 저 깊숙이 보고 싶었던 것들을 스크린에서 본다. 하지만 여성이건 남성이건, 현실의 인간들이 안토니아와 같은 길을 갈 수 있을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류가 구상한 많은 이성적 기획들이 무너진 세기말의 폐허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 폐허 위로 사람들은 극장에 가고 나는 묻는다. 우리에게 영화는 무엇일 수 있는가? 이 세상 것이면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사람들이 열광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이 날것으로서의 세상을 못견뎌하고 있다는 증좌라고, 나는 본다. <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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