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기의 음악상담실]과도한 기대와 방어기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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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동물원의 ‘변해가네’

‘변해가네’는 1988년 1월에 발표된 동물원 1집에 들어 있는 노래입니다. 나중에 죽은 광석이가 다시 불러서 더 잘 알려진 노래죠. 인생에서 사랑이란 것을 기대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려 했는데, 너를 사랑하게 된 후부터 함께하는 삶만을 원하게 됐다는 노래입니다.

1984년 초여름, 짝사랑하던 여학생과 도서관 입구에서 마주쳤습니다. 저는 들어가고 있었고, 그녀는 나가고 있었습니다. 늘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녀였죠. 이제 여름방학이 되면 몇 개월 동안 그녀를 볼 수 없다는 두려움에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녀 앞을 가로막고 무작정 말했죠. “당신을 좋아한다”고…, 아∼! 정말 외교적이지 못한 도입부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그녀가 저를 위해 했던 첫 번째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머뭇거렸고, 저는 자판기 커피를 사주면서 횡설수설 한참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송대를 지나 그녀가 살던 여학생 기숙사 앞에 와 있더군요.

학기를 마친 그녀는 다음 날 고향으로 내려갈 예정이었고, 저는 다음 날 아침에 해부학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징글징글한 생화학이 기다리고 있었죠. 하지만 시험기간에도 점심은 먹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음 날 이른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죠. 그녀가 승낙했을 때, 저는 정말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변해가네’는 그녀를 데려다주고 도서관으로 돌아갈 때 만든 노래입니다.

20여 년 동안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제가 해온 일은, 저를 찾아온 사람들의 잘못된 방어기제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받고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욕망은 늘 좌절되곤 하죠. 그럴 때 상처를 덜 받기 위해, 분노를 참거나 무마시키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릴 적에 유용했던 방어기제는 나이가 들면서는 오히려 삶에 방해가 되곤 합니다. 현실은 변했는데, 여전히 예전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죠. 방어기제도 상황에 맞게 변해야 하고 성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 변하지 않는 방어기제를 갖게 된 건 단단하게 자신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이죠.

이 노래는 저의 유치한 방어기제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어린 저는 그 욕망을 신포도로 만들고, 필요 없다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과도하게 기대하고 있었고, 누군가 사랑해줄 것 같으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단번에 변하는 겁니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라고 신나게 노래까지 하면서 말이죠.

과도한 기대는 늘 좌절과 분노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우울과 절망으로 종결되죠. 저에게도 그러한 재앙은 곧 닥쳐왔죠. 다행히 노래 몇 개는 건졌지만 말입니다.

1987년 가을, 동물원 1집의 녹음은 김창완 씨의 사무실에서 주말에 한 곡씩 진행되었습니다. 반주에 신나는 박수 소리를 넣고 싶었는데, 녹음 부스가 딱 한 사람 들어갈 만한 크기였습니다. 그래서 주말이라 아무도 없는 복도에 마이크를 내놓고 박수를 치기로 했습니다.

멤버들이 한참 박수를 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리더니 철가방을 든 아저씨가 내리셨습니다. 창완이 형이 주문한 탕수육과 짜장면이 온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어쩔 줄 몰라 하시다가, 창완이 형의 권유로 박수 치는 데 흔쾌히 동참하셨죠. 그 철가방 아저씨처럼 적응이 빨라야 합니다.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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