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배신의 칼끝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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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나 최고의 권력은 고독합니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구걸하는 사람들만 바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는 그야말로 보옥입니다. ‘명상록’의 아우렐리우스, 아시지요? 대로마 제국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인 그 남자! 지중해가 로마의 호수였을 때 로마의 황제였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얼마나 많은 혀에 치이고, 얼마나 많은 사건들에 치였겠습니까?

그가 믿었던 친구 중에 장군 카시우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 카시우스를 형제라 믿고 이집트 근방의 국경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지키는 줄 알았던 카시우스가 거기서 ‘황제’임을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믿음을 줬던 친구가 배신을 한 거지요. 무엇보다도 모욕감이 컸을 것입니다. 주변에서도 난리였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작태에 대해서는 분명히 응징해야 한다고. 당신이라면 어찌할까요? 그날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절대로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망동을 삼가라.… 남이 나를 모욕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그만이다.”

말이 쉽지 의혹이 누룩처럼 부풀고, 배신의 칼을 맞아 쓰라림 속에서 분노가 솟구칠 때 차분해질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내공입니다. 실망으로 분노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분노를 성찰의 에너지로 바꿔 쓰는 그 지혜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에 그는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납니다. 왜 그랬느냐고 묻기 위하여.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본 후에, 친구의 얘기가 옳다면 권력을 양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당하는 쪽에서는 배신이지만, 하는 쪽에서는 홀로 자기 길을 가는 건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친구가 누군가의 칼에 맞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통곡합니다. 분수도 모르고 반역의 칼을 휘두른 친구의 배신이 아파서가 아니라 상처 난 우정을 화해하지 못하고 떠난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현제(賢帝)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니겠지요?

배신을 당했을 때, 당신은 어떤 타입이십니까?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내고 응징하는 타입이십니까? 아니면 왜 그랬냐고 묻는 타입이십니까? 신뢰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물을 수 있습니다. 왜 그랬냐고.

속지 않기 위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믿음을 주며 일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실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는 자꾸 권력 뒤에, 재물 뒤에 숨어 박약한 자존감을 감추려 합니다. 더더욱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럴수록 그는 재물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난폭해집니다. 악순환이지요.

아우렐리우스를 스토아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스토아학파는 우리 안에 신적인 불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신적인 불꽃을 발견해야 하는 곳은 경건한 성전도 아니고, 한가한 강의실도 아닙니다. 거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배신과 음모가 춤을 추며, 간교한 혀와 무모한 용기가 판단을 흐리게 하는 중생의 땅이고,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던 깨어있는 마음에서입니다.

2000년을 내려오는 명상록은 언제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올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쓰였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자기가 자신에게 쓴 영혼의 일기입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배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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