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세계서 가장 비싼 와인이 가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8월 8일 02시 59분



◇ 억만장자의 식초/벤저민 윌레스 지음·박현주 옮김/400쪽·1만3800원·예담
《1985년 12월 5일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또 하나의 신기록이 나왔다.
와인 한 병이 15만6000달러에 팔린 것이다. 지금까지 깨지지 않은 이 기록을 세운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의 샤토 라피트 1787년산.
라피트는 1등급 샤토인 라피트 로칠드의 예전 이름이다. 생산된 지 200년 가까이 된 탓에 와인 상태가 온전할지는 전문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와인이 높은 가격에 팔린 가장 큰 이유는 병에 새겨진 글자 ‘Th.J.’였다. 크리스티의 와인 경매 담당자 마이클 브로드벤트는 이를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머리글자라고 소개했다.
치열한 경매 끝에 와인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발행인 맬컴 포브스에게 낙찰됐다.》
2억원짜리 ‘제퍼슨 대통령 와인’
여기저기서 위조 의혹 쏟아지자
저널리스트 저자, 진실 찾아나서

경매를 의뢰한 독일인 하디 로덴스톡도 깜짝 놀란 가격이었다. 와인 수집가인 그는 1985년 봄 파리의 한 저택 공사 중 이 와인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벽 속의 비밀 저장소에서 ‘Th.J.’가 새겨진 와인 수십 병이 나온 사실을 알고는 구입했다는 것이다.
제퍼슨은 1784∼1789년 프랑스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1787년 석 달 동안 프랑스의 와인 산지를 구석구석 누비며 여행할 정도로 와인 애호가였다. 특히 와인을 수집하는 데 남다른 욕심이 있어 빚을 내면서까지 와인을 구매했다. 이런 사연들이 서로 엮여 최고가 기록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제퍼슨 전문가인 미국 학자 루시아 굿윈이 이의를 제기했다. 제퍼슨은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한 사람이었는데 1787년산 와인을 구매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제퍼슨이 머리글자를 새길 때 ‘T.J.’ 또는 ‘Th:J’라고 하는 경우는 있어도 ‘Th.J.’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굿윈의 편에 서서 ‘제퍼슨 와인’의 진실을 파헤친다. 그는 관련자들을 일일이 접촉해 보고 들은 내용을 재구성하고 희귀 와인의 위조품이 유통되는 와인 업계의 이면을 파헤쳤다.
라피트 1787년산이 팔린 뒤 로덴스톡은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돌며 희귀 와인 시음회를 열었고 ‘Th.J.’가 새겨진 와인을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넘겼다. ‘제퍼슨 와인’은 곳곳에서 화제를 일으켰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포브스 가문에서 나왔다. 맬컴 포브스는 뉴욕 맨해튼의 포브스빌딩 1층 갤러리에 이 와인을 전시했다. 그런데 와인이 계속 조명을 받는 바람에 코르크가 오그라들어 병 속으로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어차피 마실 생각이 없었던 포브스 가문은 그 상태로 그냥 보관했다.
뉴욕의 와인가게 주인 빌 소콜린은 제퍼슨의 1787년산 마고를 손에 넣었다. 그는 유명인사들이 모인 자리에 이 와인을 자랑하러 들고 갔다가 병을 깨뜨리고 말았다. 미국 언론들은 ‘포시즌스에서의 살인’ ‘분노의 포도’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는 동안 로덴스톡이 뿌리고 다닌 와인들에 대해 조금씩 좋지 않은 얘기가 퍼졌다. 해당 샤토에서 쓰지 않는 코르크가 장착되거나 병 모양이 다른 와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제퍼슨 와인을 가장 많이 구매한 미국의 사업가 빌 코크는 로덴스톡을 상대로 ‘위조 와인을 팔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로덴스톡이 위조 와인을 팔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는 “경매 소식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후에도 파리에서 이 와인들을 발굴해낸 굴착기를 운전했다는 이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며 의문을 표시했다. “최근 와인업계에선 라벨을 바꾸거나 빈티지를 속이는 와인 위조가 많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이 책은 비싼 와인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허영심도 꼬집는다. “제퍼슨은 말년에 싼 와인들을 마셨다. 샤토에 직접 주문하는 습관을 버리고 대행인을 통해 프랑스 니스 지역의 소박한 와인들을 구매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가장 슬프게 머리를 절레절레 저을 사람은 아마도 제퍼슨 자신일 것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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