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위안의 詩]김정환 ‘어두운 일산’

  • 입력 2008년 9월 18일 02시 59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사랑을 잃은 남자는 우울하고, 사랑을 잃은 여자는 우아한가? 우울은 어둡고, 우아한 것은 슬픈 것인가? 어둠 속에서 길눈은 이어지고 길은 지워지나? 슬픔 속에서 길눈은 끊어지고 길은 그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는가? 그리고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는 완벽한 대구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는 새로운 내용이 새로운 형식을 만들지만 또 때로는 완벽한 형식은 완벽하게 내용을 규제한다. 그 규제를 끊고, 새로운 내용을 완벽한 형식 속으로 풀어 넣는 것은 좋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김정환은 귀한 시인이다. 그는 김수영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단 한 명의 시인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이전에 김정환은 유물론자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자가 아닌 자가 김수영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수영의 물적 토대를 김정환은 확장하고 관념적(유물론도 관념론이다)으로 완성한다. 미완성의 김수영을 김정환이 완성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전제에서 이 시의 완벽한 형식미와 그 안에 풀려 녹아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랑을 잃은 자는 전부를 잃어버린 자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우리로 하여금 처음으로 나를 떠나 진정한 타자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언제 우리가 진정으로 너를 생각하게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누구를 사랑하게 될 때이다. 첫사랑이란 그래서 깊은 상처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사랑이란 타자와 내가 동일시되는 게 아니라 나를 완전히 타자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그 타자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상실감에 젖어 우는 것이다. 그것은 우울하고 우아하며, 슬프고, 어둡다.

함성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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