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일급살인

  • 입력 2000년 11월 30일 17시 21분


▼<일급살인> (Murder in the First, 1994)▼

감독: Marc Rocco

형벌의 본질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처벌과 사회로부터의 격리인가, 아니면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인가? '감옥'을 '교도소'로 개명한 것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그 진보가 가져다 준 부담을 참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영화 '일급살인'( Murder in the First)은 이 해묵은 논쟁을 재연하는 영화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아름다운 도시다. 황금을 찾아 시에라 네바다산맥을 넘어 온 "49ers"가 건설한 "Golden State"의 대들보 도시다. 그 사내들이 뿌릴 황금가루 냄새를 더듬어 뉴올리언스에서 먼 뱃길을 돌아온 '블랑쉬'들이 긴 다리를 흔들어 올리던 곳이다.

바다와 만을 굽어보는 다리들과 가파른 경사로를 질주하는 전차가 더없이 정겨운 도시 ,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노랫가락대로 수많은 사내들이 심장을 떼어두고 가는 곳이다. 이 세계의 미항(美港), 샌프란시스코의 만 안에 작은 돌 섬이 있다. 이제 관광명소가 된 알카트라즈 섬은 한 때 교화의 가망이 전혀 없는 '인간 쓰레기'를 보관하는 연방형무소였다. 남북전쟁 시기에 군의 요새로 건축된 이 섬은 1934년에 미합중국 연방정부의 교도행정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감옥으로 개조되었다. 수많은 배와 사람들이 군집하는 Fishermen's Wharf에서 불과 반 마일, 그러나 올림픽 수영선수도 헤엄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해류 때문에라도 이 섬은 난공불락 연방정부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show case이였다. 세인의 주목을 받은 흉악범을 수용하여 바깥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격리를 과시함으로써 '선량한' 시민들에게 법과 질서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잠시나마 마피아의 보스 알 카포네를 수용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전시효과 때문이었다. 감옥이 들어서고 난 후 4년 동안 무려 30회에 걸쳐 탈옥의 시도가 있었으나 그 누구도 육지에 발을 디뎌놓지 못했다.

그러나 재생 불가능한 인간 쓰레기의 부피에 비해 너무나 과도한 유지비가 든다는 비판이 일자 인위적으로 인간쓰레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영화가 다룬 헨리 영의 경우이다. 영화의 막이 열리면서 흥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모자를 쓴 자랑스런 미국신사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알카트라즈는 도주가 불가능한 감옥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탈주(미수)범들은 "교화 절차"(rehabilitation process)에 회부될 것입니다. 이어서 너레이터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린다. "헨리 영이 교화절차를 시작했을 때 나는 하버드 로스쿨 신입생이었다."

열 살 때 부모를 잃고 소년가장이 된 영은 17살 되던 해 여동생을 데리고 일자리 구걸에 나선다. 일리노이의 어느 식료품 가게에서 네게 줄 일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금고에서 5달러를 훔치다 체포된다. 이 가게가 연방기관인 간이우체국을 겸했던 것이 영의 불행을 가중시킨다. 영의 죄는 "연방 우편물 강도"이다. 법은 픽션이라지만 픽션치고도 심한 관념의 조작이다. 유죄판결을 받은 영은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의 이 바위섬에 수감된다. 탈옥을 시도하다 동료 죄수의 밀고로 발각된다. 하나님과 미합중국의 이름으로 '짐승'들을 교화, 조련하는 교도관 글렌은 잔혹하고도 변태적인 린치로 영을 유린한 후에 지하 독방에 감금한다. 규정에는 19주일 이상 독방감금을 못하게 되어있지만 무려 3년 2개월을 감금한다. 장구한 시일동안 단 30분의 운동시간이 주어졌을 뿐이다. 조명시설이 전혀 없는 굴속에 3년 이상을 영은 나체로 견디어 낸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한 때 학교에서 배웠던 곱셈 암산과 기억에 남는 야구 경기를 회상하는 것으로 버틴다.

마침내 석방된 지 1시간만에 식당에서 숟가락으로 밀고자의 목을 찔러 살해한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환각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1941년 1월 나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다시 너레이터의 목소리가 울린다. 연방검사는 영을 1급살인죄로 기소하고 실로 '가망 없는' 이 사건은 신출내기 국선변호인 제임스에게 배정된다. "A monkey can try the case -I don't have confidence in you." 라는 상관의 말이 서류에 덧붙여서 넘겨진다.

변호인 제임스의 최대의 적은 피고인 자신이다. 오랜 독거 끝에 언어 능력을 거의 상실해버린 영은 타인과의 대화를 거부한다. 천신만고 끝에 영과의 대화의 창구를 열었지만 서로의 관심사가 다르다. 대화의 실마리가 열린 후에도 영은 살인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 많이 사람이 자기가 살인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니까 분명히 유죄일 것이라는 것이 그의 간결한 입장이다.

자신은 이미 사형을 각오하고 있었고 오로지 누군가 야구스타 조 디마지오( Joe Dimaggio) 의 활약상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죄인과 변호사는 동갑내기다. 그러나 미국인 최대의 오락인 야구의 대스타, 후일 세기의 섹스 심볼 마릴린 몬로와 정식 결혼했던, 그야말로 수퍼스타 중의 수퍼스타 디마지오가 누군지 조차 모르는 공부벌레 (nerd)와 이 세상에 친구 한 사람 없는 자폐증 환자 사이에 인간적 교감이 쉽지 않다. 제임스의 상의에서 묻어나는 여인의 향취를 정신없이 탐닉하는 죄수를 위해 변호인은 속임수로 여자를 들여 폐쇄된 욕망의 분출구를 찾아주려 하나 유착된 영의 남성은 미동조차 않는다.

판사는 신속한 사건의 종결을 종용하고 단 1주일의 변론기간을 준다. 온갖 장애를 무릅쓴 젊은 법률가의 노력으로 심문과정에서 형리(刑吏)들의 잔혹행위가 밝혀진다. "나의 영웅은 베이브 루스, 루 게릭이 아니었다. 에밀 졸라, 클레어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가 나의 영웅이었다." 제임스는 살인자 헨리에게는 공범자(co-conspirator)가 있다는 기막힌 주장을 편다. 검사가 발끈한다. 도대체 3년 동안 외부와의 일체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고, 석방 1시간도 채 못되어 벌어진 살인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공범 타령이냐는 검사의 말을 되받아 제임스는 그렇듯 비인간적인 감옥과 교도관들이 살인의 공모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한다. 감옥의 잔혹한 상황이 영으로 하여금 살인으로 내몰았다는 논리다. 다시 말하자면 감옥이 가해자이고 죄수가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뜻밖에도 판사는 제임스의 신청을 받아들여 알카트라즈의 교도관들을 '인간성에 대한 죄'(crime against humanity)로 심문할 것을 동의한다. 그러나 감옥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증언할 사람이 없다. 게다가 연방정부의 위신을 해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각종 정치적 압력이 주어진다. 제임스가 거절하자 법률구조협회는 제임스를 해고한다. 그러나 영이 새로 임명된 다른 변호사와 의사소통을 거부하자 이제 제임스는 사선변호인의 자격에서 영의 변론을 계속한다.

용케도 전직 간수의 한 사람인 심슨을 증언대에 세워 그가 글렌의 지시에 의해 영에게 가혹행위를 한 진술을 받아냈으나 검사는 그가 상습적인 음주벽 때문에 해고된 사실을 드러내어 증인으로서의 신빙성을 탄핵한다. 일류 로펌에서 활동하는 제임스의 형도 형제간의 우애를 무기로 인생충고를 건넨다. 제임스는 가혹행위를 한 장본인인 글렌을 증언대에 세운다. 글렌은 재직 중에 서른 두 사람의 죄수가 쇠 조끼에 결박당해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는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교도소 감시관 헌트가 증언대에 선다. "천만번 양보해도 헌트만은 증언대에 세우지 말라, 그는 워싱턴의 후버 정보국장이 직접 임명한 사람이다."라던 형의 협박과 애원을 뿌리친 것이다. 심문을 통해 헌트가 실제로 알카트라즈 감옥 현장을 방문한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글렌이 어떤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 전혀 모른다고 답한다. 3개 감옥의 책임을 맡은 자신이 어떻게 이 작은 감옥 내부에서 벌어진 미세한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겠는가 라는 항의도 내비친다. 그는 단지 이 사건에서 영이 탈옥을 시도했다는 사실만을 거론할 뿐이다.

그러나 피고인 영은 자신이 가벼운 형에 처해지면 다시 알카트라즈에 수감될 것이 두려워서 사형을 원한다. 제임스는 스스로 일급살인의 유죄를 인정하겠다는 영을 증언대에 세우는 모험을 감행한다. 극적인 심경의 변화를 겪은 영은 마침내 알카트라즈에 돌아가지 싫은 이유를 밝히면서 "나는 무기일 뿐, 그들이 살인자" (I was the weapon, they were the murderer)라는 변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진술을 한다. 배심은 일급살인 대신 3년 징역의 '과실치사'(involuntary manslaughter)를 평결한다. 동시에 알 카트라즈의 상황을 조사하여 처벌할 것을 권고한다. 영은 다시 바위섬으로 보내진다. "나는 변호사가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한 것은 친구야" 절규하던 영은 이제 제임스를 친구로 부르고 둘은 디마지오의 기록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연속 몇 게임 안타를 쳤지? " " 54게임? 아니야, 56게임이야."

우려했던 대로 영은 독방에 다시 감금되고 이내 시체로 발견된다. 헤어지기 전에 제임스에게 다짐했듯이 다시 한번 '블랑쉬'의 두 개의 바위틈에서 청춘을 찾는 뱀이 되어보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펴지도 못하고 짧은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7개월 후 연방대법원의 판결 끝에 알카트라즈의 교도관들은 처벌을 받았고 20년 후에는 감옥도 영원히 폐쇄된다. 영으로 인해 제임스도 여느 미국인처럼 열렬한 야구팬이 된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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