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용한의 전쟁史]〈94〉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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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에 근접하자 일본군 사령부는 미드웨이와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미국 항공모함 중 어디를 먼저 공격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고민할 것까지야 없었다. 미군 항모전대를 발견한다면 그들을 먼저 공격해야 했다. 정찰기를 발진시켰는데 사소한 고장으로 한 대가 30분 늦게 출발했다. 하필 이 정찰기가 담당한 구역에 미국 함대가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함에서 발진한 급강하 폭격기 편대는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연료 부족으로 거의 포기해야 할 때쯤 편대장 매클러스키 소령이 본대를 찾아가는 일본군 구축함 한 대를 발견했다. 그 구축함을 따라가자 일본 항모가 나타났다.

그때 일본군의 엄호 전투기들은 저고도로 공격하는 미군 뇌격기 편대를 잡기 위해 저공에 내려와 있었다. 당시 전투기는 상승력에 한계가 있어서 고공에서 내리꽂히는 급강하 폭격기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순간 일본 항모 갑판은 어뢰를 장착하고 연료를 만재한 함재기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이륙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5분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사를 따라가 보면 이것 말고도 수많은 우연적 사건이 있다. 그중 한 개의 우연만 없었더라도 승부가 바뀌었을 것이고, 태평양 전쟁은 어디로 흘러갔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정말 그랬을까? 기록되지 않은 우연은 더 많았을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우연적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중에는 불가항력적인 운도 있지만, 구조적 결함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우연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필연적 우연이며, 그것을 줄이는 것이 승부의 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의 잘못을 천운 탓으로 돌린다. 권력을 잡으면 이 천운 의존증이 더 심해진다. 자기 행동의 필연적인 결과도 운 탓으로 돌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입버릇처럼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한다. 알고 보면 그 초심이 잘못의 근원인데 말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니 항모도 가라앉힐 만큼 우연과 남 탓만 쌓여가는 중이다.
 
임용한 역사학자
#미드웨이#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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