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300여 년 겹겹 어둠 인고의 세월을 아 용하게도 끝내 견디어냈구나 부스스 어둠 털고 현신하던 날 사비성 날빛도 눈이 부셨다
부소산 밝은 등성마루 자운 피어오르고 백강 굼니는 용들 현란한 별빛이었다 둥둥실 날앉은 봉황의 저 영걸스런 눈빛이여
한 동산 날짐승 길짐승뿐 아냐 저승 이승 귀신도 사람도 연꽃으로 벙근 가슴 하냥 산그러졌구나 아 이제 옷깃 여며 합장하노니 시방세계 펑퍼지는 향훈이거라
불꽃이 인다. 하늘을 찌르던 백제왕국의 영화가 오랜 어둠을 사르고 마침내 깨어나 문화대국의 제향(祭香)을 뿜어 올린다. 나당(羅唐)의 말발굽에 무너져 궁궐도 사찰도 찬란무비의 예술품도 거의 소실되어 정수(精髓)를 찾을 길 없더니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450여 점과 함께 ‘백제금동대향로’가 마치 램프 속에서 잠을 깬 마왕인 듯 눈부신 광채를 쓰고 큰 몸뚱이로 걸어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백제가 여태껏 살아있었구나. 한국 고미술학계가 발칵 뒤집히고 학자들은 눈을 비비고 탄성을 내지른다.
향로의 뚜껑에는 선계(仙界)를 나타낸 듯 23개의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신선 새 호랑이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를 비롯한 상상의 동물들이 우글거리고, 5명의 악사가 거문고 완함(阮咸) 종적(縱笛) 배소(排簫) 북 등을 연주하고 있다. 상상봉에서는 봉황이 여의주를 물고 날갯짓을 하고 있다.
아랫도리에는 포효하며 승천하는 용의 기상이 자못 사납다. 높이 61.8cm, 지름 19cm의 몸통에 물결과 연꽃과 불로초가 어우러진 신의 조각과 더 어찌할 수 없는 과학적인 설계로 구성된 이 대향로는 스무 해 전 처음 발굴되어 국보 제287호(1996년 5월 30일 지정)로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다.
프랑스 루브르 같은 대형 박물관에 가도 이렇듯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천상의 세계, 누구도 갈 수 없는 나라의 복락과 평화를 새겨낸 예술품은 만날 수 없는 것. 시인은 시조의 가락을 빚어 헌사를 바친다. “저승 이승 귀신도 사람도/연꽃으로 벙근 가슴” “옷깃 여며 합장하노니/시방세계 펑퍼지는/향훈이거라” 이 불꽃, 이 향기 온 겨레 억만 년 다함없는 축복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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