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구 소련 탄저균 유출 사고

  • 입력 2008년 4월 2일 03시 03분


2001년 9·11테러에 이어 세계는 ‘백색 가루 공포’에 빠져들었다. 흰 가루 형태의 탄저균이 담긴 우편물이 미국 정부기관 등에 배달됐다. 편지를 열어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탄저균에 감염돼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탄저균 테러’에 대한 두려움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장갑과 마스크를 쓰고 우편물을 개봉하는 사람, 밀가루를 넣은 협박 편지도 등장했다.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한 생물 테러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커졌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1370km 떨어진 도시 예카테린부르크. 이 도시는 실제로 탄저균이 부른 참극을 경험했다. 구(舊)소련 시절 이곳은 ‘스베르들롭스크’로 불렸다. 1918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의 처형을 명령한 볼셰비키 당원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79년 4월 2일 이 도시의 도자기 공장 근로자들 사이에서 고열과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괴질(怪疾)’이 돌기 시작했다. 집단 발병한 지 나흘 만에 환자 한 명이 숨을 거뒀다. 가축들마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사인은 탄저균 감염. 98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이들 중 64명이 6주 내에 사망했다.

소련 당국은 탄저균에 감염된 육류와 가축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어 도시로 반입되는 육류의 검역을 강화하고 주인 없는 개를 도살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이는 진실을 감추기 위한 ‘쇼’에 불과했다. ‘탄저균의 진실’은 이 도시에서 비밀리에 운영 중인 소련군의 생물학 무기공장에 있었다. 공장 직원의 실수로 탄저균이 공장 밖 도시로 퍼졌지만 소련 당국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1992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탐욕에 휘둘리면 어김없이 대재앙이 예비된다. 핵무기도 생물학 무기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나노기술이 살상 수단으로 쓰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마지막 세기’의 저자인 마틴 리스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2005년 영국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진과 운석 충돌 같은 자연적 위협 외에 인류 스스로가 초래할 위협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류가 탄저균보다 더 무섭다는 일갈이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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