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만 있나?… 이순지-이천도 있다

  • 입력 2008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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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과학 수준 자랑한 세종 시대 과학자들

《“세종대왕 시대 최고의 과학자는 □□□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질문에 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장영실이다. 그러나 국내 과학사학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장영실이 비록 천재적인 기술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당대 최고 과학자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드라마 방영으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세종대왕 시대의 최고 과학자는 누구일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를 3명 들라면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꼽고 싶다”며 “장영실은 일반인들에게 최고의 인기 과학자이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최고로 꼽히는 과학자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 세계 최고 과학이 꽃핀 세종시대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도 “세종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면 이순지와 이천”이라며 “강의를 해보면 학생들도 오직 장영실만 알고 그를 최고로 치는 사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취재한 다른 과학사학자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학계에 따르면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한국 과학사학계의 원로인 전상운(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박사는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학회’에서 15세기 전반을 세종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낸 ‘과학기술사 사전’에도 세종시대 세계적인 과학기술 업적이 29개나 실렸을 정도다. 같은 시기 중국은 3, 4개, 일본은 아예 없었다. 전 박사는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런 업적을 이뤄낸 과학자들은 누구일까?

세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과학 프로젝트 중 하나가 천문학, 당시 동양 용어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시간을 알아낸 역법이었다. 세종 시대에 중국의 역법을 뛰어넘어 우리만의 역법이론을 세운 과학자가 바로 이순지다.

실록에 따르면 병약하다고 알려진 이순지는 세종의 명을 받아 조선 고유의 역법 체계를 완성해 ‘칠정산내외편’을 지었다. 그를 통해 조선은 천체의 운행을 한반도의 땅과 하늘에 맞춰 계산하게 되었다.

이천은 천문기구의 제작 책임을 맡은 과학기술자였다. 금속기술자이자 무신이었던 이천은 혼천의, 앙부일구 등 천체 관측 기구의 제작을 책임졌다.

이 밖에도 이천은 갑인자라는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서양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보다 50여 년 앞선 발명품이었다. 화포 등 무기 개발도 이천이 맡았다.

이 밖에 농사직설 등을 펴내는 등 여러 문헌 편찬을 맡았던 정초와 정인지, 의학책 향약집성방을 지은 노중례, 지도를 만든 정척과 양선지 등이 세종 시대 대표적인 과학자였다.

○ 극적인 삶이 낳은 장영실 신화

문 교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이천 밑에서 과학 기구 제작을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며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정교한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가 장영실 고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과학사학자들은 세계 수준의 천문 이론을 독자적으로 만든 이순지나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이천이 자격루와 옥루 제작만 책임졌던 장영실보다 업적 면에서 더 훌륭한 과학자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왜 일반 사람들에게는 장영실이 최고로 알려졌을까? 문 교수는 “장영실이 훌륭한 과학기술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의 자존심 살리기와 노비에서 출세한 드라마적인 그의 삶이 결합되면서 다소 과대포장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장영실과 관련된 일부 민간단체가 ‘장영실 신화’를 확대 생산했다는 것이다.

장영실이 신화가 되다 보니 엉뚱한 주장이 마치 사실처럼 둔갑했다. 측우기는 세종의 아들 문종이 세자 시절 아이디어를 내 만들게 했던 것인데 많은 사람은 마치 장영실 혼자 만든 것처럼 알고 있다. 문 교수는 “역사 기록에는 장영실이 측우기 개발에 참여했다는 흔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장영실이 원나라에서 귀화한 고위 기술자와 동래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분명한 기록도 현재 엉뚱한 족보로 바뀌었다.

전 교수는 “세종 시대 우리 땅에는 세계 최고의 과학이 꽃피었다”며 “장영실의 극적인 삶에 가려 있지만 세종과 함께 위대한 과학을 이뤄낸 다른 과학자들이 더 많이 조명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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