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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그 길, 예술이네”…진화한 보도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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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그 길, 예술이네”…진화한 보도블록

입력 2006-10-20 03:04수정 2009-10-0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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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왜

보도블록 틈 사이에 끼여

피어날 때가 많을까

나는 왜

아파트 뒷길

보도블록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날이 많을까

시인 정호승의 동시 ‘민들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강박증 환자 멜빈(잭 니컬슨)은 걸을 때마다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보도블록.

매일 어쩔 수 없이 마주친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인간미나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생명을 억압하거나 도시를 어둡게 만드는 회색의 틀이다.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뜨겁던 1980년대 초중반, 보도블록은 땅에 깔려야 하는 ‘본분’을 지키지 못하고 깨어진 채 허공으로 날아갔다.

맨주먹으로 최루탄에 맞서야 하는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무기’였다.

90년대 들어 세상이 바뀌면서 보도블록의 모양도 바뀌었다.

이전의 획일적인 회색이 아니라 빨강과 초록, 노랑으로 곱게 화장했다.

새색시처럼 다양한 색깔과 디자인으로 치장한 신개념의 보도블록이 등장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멀쩡해도 금세 뜯겨 나가는 처지는 여전하다.

최근 3년 동안 서울시내 각 구청이 보도블록 교체에 쓴 돈은 350억 원이 넘는다.

매일 밟는 그 보도블록은 당신이 모르는 사이 진화(進化)하고 있다.

할 말도 많다.》

○ 보도블록을 보면 세상이 보인다

서울대는 1년 넘게 걸린 ‘걷고 싶은 거리’ 공사를 지난달에 마무리했다. 학생들의 투석 시위를 막기 위해 20여 년간 깔려 있던 시멘트와 콘크리트가 마침내 벗겨진 것이다. 경영대∼박물관∼대학본부∼도서관∼중앙 통로∼공대 폭포에 이르는 2km 구간이다. 4∼8m 폭의 보행로에는 환경친화적인 흙벽돌이 깔렸고 나무와 가로등으로 조경을 했다.

보도블록은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우리 곁에 다가왔다. 이전에는 보도와 차도가 대부분 흙 포장이었다.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가로세로 30cm의 회색 시멘트 블록이 등장했다. 회색 블록은 이 무렵 치솟기 시작한 고층 아파트, 빌딩과 짝을 이뤄 도시의 ‘회색 시대’를 열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전하면서 최초로 바닥에 깐 것은 ‘건빵 블록’이다. 건빵을 닮은 직사각형에 점이 두 개 찍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요철형의 시멘트 ILP(Interlocking Paver) 블록이 인기를 끌었다. 학생들은 한 손에 잡기 좋은 이 블록을 깨뜨려 던졌고, 그러면 학교 측은 다시 포장하는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1976년부터 서울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원유철(기술과 토목기사) 씨의 말.

“1980년대 초반엔 지독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것이 고역이었죠. 특히 ILP 블록은 ‘시위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위대가 많이 사용했습니다. 83년 쯤으로 기억하는데 학교 측에서 견디다 못해 주요 보도를 콘크리트로 덮었어요.”

○ “바닥 민심이 고약했어.”

1980년대 젊음의 공간인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도 보도블록에 얽힌 추억이 있다.

“바닥을 보고 다니면 세상이란 ‘놈’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 수 있었지. 여기저기 깨져나간 블록을 통해 시끄러운 세상을 읽었어. 게다가 공사는 얼마나 자주 하던지. 연극과 세상 얘기를 하다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러 번 넘어졌어. 한마디로 ‘바닥 민심’이 고약했던 게지(웃음).”

대학로를 줄곧 지켜 온 연극배우 이호재 씨는 “그러다 어느 순간 큰길의 보도블록은 아스콘으로, 작은 길은 시멘트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대학 캠퍼스나 대학과 인접한 공간에서는 보도블록이 콘크리트로 교체됐지만 다른 곳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시멘트 ILP 블록은 80년대 ‘바닥의 간판스타’였다. 요철 모양이 서로 맞물려 견고한 데다 그 틈새로 물이 잘 빠져 배수 효과도 컸다. 요즘도 거리 보도는 ILP 블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88년 서울올림픽은 이 블록의 전성기였다. 정부는 ILP 블록으로 경기장 주변과 공원 안팎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조경 전문가나 외국인의 눈에는 판에 박힌 ‘괴물’로 비쳤다.

○ 보도블록에도 참살이 열풍

1990년대 중반 이후 ‘바닥 세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해외여행과 참살이 열풍으로 거리 환경에 대한 시민들의 안목이 높아진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다양한 기능을 가진 보도블록이 나타나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점토벽돌은 최근 각광받고 있는 대표적인 기능성 블록으로 꼽힌다. 점토와 고령토 등을 재료로 1200도 안팎의 고온에서 36∼38시간 구워 만들기 때문에 ‘도자기 벽돌’로도 불린다. 원료가 흙이어서 물을 통과시키는 투수성(透水性)이 뛰어나다. 재료 배합에 따라 빨강, 핑크, 아이보리, 갈색 등 여러 색깔이 나온다.

이 블록은 80년대에 개발됐지만 ILP보다 비싼 가격 때문에 외면당했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는 점토벽돌에 빛을 찾아준 구세주였다.

점토벽돌로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주변을 시공한 공간세라믹 김영주 상무의 말.

“올림픽 때의 보도블록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덮고 가리는 단계였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월드컵에서는 친환경성과 내구성 등 ‘속’까지 고민하는 수준이 됐죠.”

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아파트의 고급화도 보도블록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거주 공간의 개념이 아파트 일변도에서 벗어나 단지 내 시설과 인근 공원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 보도블록의 진화와 미래

보도블록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한울코리아의 ‘RW투수(透水)블록’은 이른바 나무 블록이다. 자연 소재인 목재를 블록 형태로 가공한 뒤 주변을 고무 틀로 감싼다. 서울 양재천 주변과 양천구청 등에 시공됐다. 나무 덱처럼 자연스러우면서 친환경적인 조경 효과를 낸다.

기존 점토벽돌의 투수성을 강화한 ‘물 먹는 벽돌’도 등장했다. 이 벽돌은 비가 올 때 물을 블록 내부로 통과시켜 일정한 양을 저장한 뒤 천천히 아래로 내보내 집중호우에 강하다. 11월 경기 의정부시의 일부 보도에 쓰여질 예정이다.

요업기술원 김형태 박사는 “점토를 이용한 블록은 물이 그대로 흐르게 하는 불투수성 블록과 달리 물을 흡수해 통과시키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효과가 뛰어나다”며 “일부 연구에서는 도심의 열섬 현상을 막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광촉매를 이용한 오염방지 기능을 가진 블록도 있다. 자외선과 광촉매가 만나 발생시킨 활성산소가 블록 표면에 붙는 오염물질을 분해하거나 제거하는 원리다.

올 8월 집중호우 때 가벼운 무게 때문에 떠내려가 문제가 된 대학로 일부 구간의 블록은 폐타이어를 재활용한 것이다. 시공 방법을 개선하면 재활용 상품으로 각광받을 가능성도 있다.

요즘 기능성 블록의 강력한 경쟁자는 중국에서 ‘굴러온 돌’이다. 2004년을 전후해 중국산 대리석과 판석, 화강석이 저렴한 가격에 수입되고 있다. 돌은 바닥재로 사용하면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나지만 불투수성이라는 약점이 있다.

보도블록의 미래는 어떨까.

‘서울숲’을 설계한 조경설계사무소 동심원의 안계동 소장은 “고정관념처럼 남아 있는 차가운 시멘트 보도블록의 시대는 끝났다”며 “이제는 흙을 닮은,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비싸고 아름다운’ 보도블록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보도블록을 위한 변명으로 충분할까, 아니면 ‘그래봤자 보도블록’일까.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gn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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