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실업]줄없는 국내박사 교수채용 푸대접

  • 입력 2000년 9월 5일 18시 51분


국내에서 관광학 박사학위를 받은 윤모씨(40)는 5년 경력의 시간강사. 관광 분야 전문가로 자부하며 20여개 대학의 교수 채용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쓴맛을 봐야했다. ‘국내박사’란 꼬리표 때문.

한 사람에게 15분씩 배정된 최종 면접에서 외국 박사에게는 20분 이상 시간을 할애하면서 자신에게는 채 5분도 주지 않았다.

“학문적 자질과 업적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질 않아요. ‘집이 어디냐’ ‘애들은 몇 명이냐’ ‘부인은 뭘 하느냐’는 등 잡다한 신상만 묻습니다. ‘공개 경쟁’의 모양을 갖추려고 들러리로 세운 거지요.”

박사라고 해서 다 같은 박사가 아니다. 국내 박사는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대학이나 연구소는 외국 박사를 선호한다.

전체 박사학위 소지자 9만983명 가운데 국내 박사는 약 77%, 외국 박사는 약 23%다. 외국 박사 2만623명을 취득 국가별로 분류하면 몇 개 국가에 편중된다. 미국이 58.5%로 가장 많고 일본 16.1%, 독일 8.4%, 영국 3.0% , 프랑스 1.0% 등의 순이다. 취득 국가 56개국 가운데 8개국에 93.7%가 몰려있다.

외국 박사 가운데 미국 박사 선호 경향은 뚜렷하다. 유럽이나 기타 지역에서 어렵게 학위를 받아도 국내에서는 제대로 대접받기 힘들다.

영국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K씨는 고생 끝에 교수가 되긴 했지만 그 과정을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난다. 모두 미국 박사들인 심사위원들은 “영문학을 왜 영국에서 하느냐” “우리 기준으로 당신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등 시종 유럽 학문을 얕보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것. 영국 박사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겨우 교수가 됐다.

불문학 박사인 L씨는 “유럽에서는 박사 학위를 따는 데 6∼9년이 걸리는 것은 보통”이라며 “미국 박사들이 일종의 학맥을 형성해 유럽 박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실제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 가운데 67%가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학맥 인맥을 중요시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교수 채용 관행은 주요 대학의 본교 출신 교수 채용비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본교 출신 교수 비율은 서울대가 95.2%로 가장 높고 연세대 80.9%, 고려대 62.6%, 조선대 73.25%, 경북대 59.4%, 전남대 50.2% 등으로 도가 지나치다.

교육부 김화진(金華鎭)대학원지원과장은 “특정 대학 출신들만으로 교수를 뽑으면 똑같은 이론을 대물림하는 동종교배(同種交配)현상이 나타나 새로운 학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며 “이런 관행은 대학과 국가 모두에 손해”라고 말했다.

이같은 불합리한 교수 채용 관행 때문에 시간강사 등으로 전전하다 외국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명문대 공학박사인 김모씨는 첨단과학기술인 GPS분야의 전문가. 3년간 시간강사 연구원 등으로 일했지만 앞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미국을 거쳐 캐나다의 N대학 연구원으로 옮겼다. 보수도 국내보다 훨씬 많지만 실력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좋아 아예 캐나다에 정착할 생각이다.

KAIST 이광형(李光炯)교수는 “미국이 세계화의 중심인 것은 분명하지만 특정 지역만 우대하는 것은 ‘학문 편식’을 가져올 수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라도 국비유학생을 국가 지역별로 안배해 선발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인철기자>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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