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돌]통계로 본 80년/평균수명 60년새 30년 늘어

  • 입력 2000년 3월 31일 20시 52분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부터 2000년까지 80년 동안 한국 사회는 5000년 역사의 그 어떤 시기의 80년보다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강산이 여덟 번 변했다’는 말로는 지난 80년간의 변화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조선총독부 통계연감 1909∼1943’(조선총독부 발간) ‘통계로 다시 보는 광복 이전의 경제사회상’(통계청) ‘대한민국 5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통계청) ‘서울통계연감’(서울시) ‘광복 50주년 기념 논문집’(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의 사회제도와 농촌사회의 변동’(한국사회사연구회) 등 한국현대사 관련 자료와 논문에 기록된 통계를 토대로 지난 80년 동안의 한국 사회의 변화를 살펴본다.》

◇인구변화◇

지난 80년 동안 한국사회의 틀은 엄청나게 변했다. 인구는 4배 가량으로 늘었고 인구구성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도시화 산업화로 전국 곳곳에 거대도시가 생겨나 국토는 완전히 새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인구 및 인구구성〓조선총독부 통계연감에 따르면 1920년 한반도의 인구는 1728만명(일본인 34만명 포함). 98년 말 현재 남북한을 합친 인구는 6837만명. 80년만에 한국의 인구가 4배로 늘어난 것이다. 99년 말 현재 인구밀도는 467명으로 1920년 78.3명의 6배 수준이다.

연도별 인구변화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남녀 성비가 1910년에는 112대 100이었다. 그러나 강제징용이 한창이던 43년에는 99.9대 100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1만4000명 더 많았다.

‘여초(女超)현상’은 6·25전쟁 기간인 50년대 초 다시 나타났다. 전쟁 직전인 49년만 해도 남녀성비가 102.1대 100으로 남자가 많았다. 그러나 인구통계를 다시 내기 시작한 56년에는 95.4대 100으로 남자가 훨씬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초현상은 이후 59년까지 계속되다 60년부터 다시 남자가 많아져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도시화〓1950년 당시 도시에 사는 사람은 100명당 17.2명. 그러나 이 비율은 급속히 높아져 100명당 도시 인구는 60년 28명, 70년 41명, 80년 57명, 95년 78.5명이 됐다. 전체 인구의 도시 거주 비율이 45년만에 4.5배 가량 늘어났다. 이를 유엔의 도시인구 변천사 자료(94년판)에 기록된 70개 국가와 비교해보면 사우디아라비아(50년 15.9%에서 95년 80.2%)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될 만큼 도시화가 빨리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결혼〓최근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가 점점 늘고 있다. 이상한 현상처럼 보이지만 사실 80년 전에는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일본인 학자들이 발간한 ‘조선의 인구연구’ 논문에 따르면 1912년 당시 30∼35세 기혼여성의 배우자 연령은 20세 미만이 2.9%, 20∼24세 6.4%, 25∼29세 20.8%였다. 30대 초반의 기혼여성 가운데 30% 이상이 연하의 남자와 살았던 것.

그동안 초혼연령은 계속 높아졌다. 1935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당시 10∼14세 여성의 4%, 15∼19세 여성의 63%가 기혼이었다. 또 남자는 15∼19세 23.6%, 20∼24세는 67%가 기혼자였다. 25세 이상 남자 가운데 미혼은 7.9%뿐이었다. 98년의 평균 초혼연령(남자 29세, 여자 26.2세)과 비교하면 지난 80년 사이에 결혼연령이 5∼10년 가량 높아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서울인구는…▼

현재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는 남한 전체 인구의 46%(95년 인구센서스 기준)가 살고 있다. 그러나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권 인구 집중현상은 상상 밖의 일. 1920년 경기도(서울 인천 포함) 인구는 한반도 전체의 10.3%로 경북(12.2%) 전남(11.3%) 경남(10.4%)보다 적었다. 20년대 말 당시 경성부(京城府)의 인구는 25만명으로 현재 서울인구의 2.5% 수준이었다. 한편 1940년에는 당시 인구중 93.5%가 자신이 태어난 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삶의 질◇

80년 전보다 우리는 더 행복한가.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사회가 각박해지고 삶이 고달파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인간의 보편적 희망 가운데 하나인 ‘오래 살기’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우리 사회는 계속 발전해 온 것이 틀림없다.

▽평균수명〓1936년 당시 한국인 평균수명은 42.6세(남자 40.6, 여자 44.7세). 그러나 의료혜택 수혜자가 늘어나면서 평균수명은 60년 52.4세에서 70년 63.2세로 10년만에 10.8세가 높아졌다. 이후 87년 70세, 95년 73.5세 등으로 평균수명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가난〓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겨우 연명할 정도로 생활이 매우 궁핍한 상태’인 계층을 ‘세민(細民)’, ‘긴급구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계층을 ‘궁민(窮民)’으로 분류했다. 1931년 발간된 ‘숫자조선연구’에 따르면 26년 당시 △총인구의 9.7%인 186만명이 세민 △인구의 1.5% 가량인 29만6000명이 궁민 △1만명이 걸인으로 분류됐다.

당시 총인구의 11%에 해당했던 극빈층은 30년 21.4%, 31년에는 26.7%로 늘어났다. 특히 걸인은 26년 1만명, 31년에는 16만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98년 말 현재 생활보호대상자는 전체 국민의 2.5%에 해당하는 117만명. 기준이 다르고 가난이 상대적 개념인 만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80년 동안 극빈층은 상당히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교육수준〓국민 대부분이 ‘일자무식’이었던 사회에서 급속히 ‘고학력 사회’로 변했다.

1944년 발간된 ‘국세조사결과’에 따르면 12세 이상 인구 중 무학자가 79.8%였다. 6년 과정인 국민학교 초등과를 졸업한 사람은 10.6%뿐이었다. 대졸자는 1만명에 5명 꼴인 0.05%, 전문학교 졸업자는 1만명에 14명 꼴인 0.14%였다. 학력수준은 60년대부터 급속히 높아져 2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자는 66년 79%, 80년 55%, 90년 33%, 95년 26%로 줄었다. 대졸 이상 학력자 비율은 80년 7.7%에서 90년 14.1%, 95년 19.7%로 높아졌다.

▽생활 편의 시설〓전국민 휴대전화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지만 지금부터 90년 전인 1910년 당시 전화가입자는 254명뿐이었다. 41년 말에는 1만7620명으로 인구 1300명당 1명 꼴이었다. 98년 말 현재 유선전화 가입자는 업무용을 합쳐 2008만명. 88년만에 7만9000여배로 늘어났다.

1935년 당시 수돗물이 공급된 집은 18만3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3.6%에 불과했다. 전기가 공급된 가구는 35만 가구였지만 이중 상당수는 일본인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98년 현재 상수도 보급률은 85.2%. 전기는 1410만 곳에 공급되고 있다.

▽여가 생활〓1935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연간 연극 관람객은 249만2400명. 인구 8.8명당 1명 꼴로 연극을 본 셈이다. 영화(활동사진) 관람객은 연간 878만명으로 2.5명당 1명이 1년에 한차례 영화를 본 셈이다.

이후 영화관람객은 61년 5860만명, 69년 1억7300만명으로 늘었다가 TV 등의 대량보급으로 다시 줄어 98년에는 영화관람객이 5017만명으로 집계됐다.

<이기홍·서정보기자>sechepa@donga.com

▼여가생활은…▼

1935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연간 연극 관람객은 249만2400명. 인구 8.8명당 1명 꼴로 연극을 본 셈이다. 영화(활동사진) 관람객은 연간 878만명으로 2.5명당 1명이 1년에 한차례 영화를 본 셈이다.

이후 영화관람객은 61년 5860만명, 69년 1억7300만명으로 늘었다가 TV 등의 대량보급으로 다시 줄어 98년에는 영화관람객이 5017만명으로 집계됐다. 한편 책은 1948년에는 연간 1136종이 발행됐으나 98년에는 2만7313종으로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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