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색조화장… 추천사의 미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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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책은 묵직하게, 무거운 책은 경쾌하게

교열과 표지 작업까지 마무리했다. 이제 ‘그것’만 받으면 출간이다.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까.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 ‘빛의 과거’ 출간(올해 8월)을 앞두고 은 작가와 이민희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팀장은 머리를 싸맸다. 책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추천사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택한 인물은 신형철 평론가와 정세랑 작가. 이 팀장은 “다양한 세대가 공감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 정 작가에게, 문학적 조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신 평론가에게 추천사를 각각 부탁했다”고 했다.

추천사는 책의 핵심을 전하는 짤막한 글이다. 보통 권당 한두 편을 받는데, 데뷔작이나 기대작은 홍보용 추천사를 따로 받기도 한다. 청탁 1순위 기준은 책과의 궁합. 작품 세계가 비슷하거나 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물을 신중히 고른다. 장류진 작가의 데뷔작 ‘일의 기쁨과 슬픔’의 추천사를 정이현 작가가 쓴 건 ‘일, 도시, 사랑’이란 공통분모 때문이었다. 추천사는 보완재 역할도 한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가벼운 책은 어렵게 쓰는 작가에게, 무거운 책은 유머를 갖춘 작가에게 글을 받아 균형을 잡으려 한다”고 했다.

동료 작가의 작품 평가는 부담스러운 일. 이 때문에 요즘에는 지인이 응원 글처럼 추천사를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작가와 친분이 깊은 인물 간의 역사가 깃든 추천사는 한결 깊고 그윽해진다. 장석남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에서 권여선 작가는 “내가 아는 그는 술 퍼먹고 무언가를 묻는 자였다. 그의 질문은 사소하여 철학적이었다. 내가 읽은 그는 시 속에서 웅얼웅얼 답하는 자였다. 그의 대답은 절박하여 미학적이었다”고 썼다.

인권, 페미니즘, 과학 등 책의 주제와 관련 있는 이들도 종종 추천한다. 이는 새로운 독자층을 공략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일상에 만연한 폭력을 다룬 애나 번스의 장편소설 ‘밀크맨’은 김영란 전 대법관과 김보라 영화감독이 추천사를 달았다. 아나운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홍 작가의 신작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박지윤 아나운서가 추천했다.

해외 문학 작품은 유명 인물의 추천평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추천한 책은 따로 홍보가 필요 없을 정도라고 한다. 국내에서 잘 팔릴 만한 소설은 국내 작가에게 따로 추천사를 맡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올해 1월 출간했을 때는 추천사를 넣지 않았지만 저자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 정이현 작가에게 추천글을 받아 새로 실었다.

“추천사는 대세 작가를 보여주는 가늠자”라는 말도 있다. 쓰는 이가 대중성을 갖춰야 홍보 활용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출판계에 따르면 정이현 김연수 정세랑 박상영 소설가와 신형철 강지희 인아영 평론가가 추천사를 자주 쓰는 편이다.

백다흠 악스트 편집장은 “정이현 작가는 과하지 않은 선에서 친절하게 책을 설명하고 신형철 평론가는 문학적으로 분석한다”고 평가했다. 정세랑 작가는 순문학은 물론 장르문학 추천사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추천사계 리베로’로 불린다.

역대급 추천사는 작가에 대한 수식어로 남는다. 박범신 작가가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에서 언급한 “그녀는 괴물 같은 소설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추천사는 편집자의 고유 권한이지만 저자와 협의를 거친다. 추천사를 원하지 않거나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추천사에 대한 호불호도 갈린다. 한 중견 소설가는 “추천사는 기본적으로 권위에 기대는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는다. 잘못하면 주례사처럼 보일 수 있어 소설이나 해설의 발췌문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한 대형 출판사 편집자는 “자기 색을 강조하거나 개그 욕심을 내는 추천사는 없는 게 낫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추천사#책 편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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