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청년들에게 개인 아닌 사회가 문제라고 말하라[동아 시론/허지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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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년세대 자살률은 요지부동… 자존감에 대한 비관적 관점 심각해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 틀에서 벗어나야
정파를 떠나 편안히 실패해도 되는 물리적, 정신적 안전장치를 늘려야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한국에서 청년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생존’에 가깝다. 초중고교의 내신 및 학생부종합전형(학종) 관리, 수능, 경쟁적 대인관계, 그리고 이어지는 취업난. 쉬운 것이 없다. 가까스로 구직에 성공해도 고용은 불안정하며 학자금대출 상환과 내 집 마련 자금에 대한 압박감은 거대하다. 이 와중에 기울어진 운동장 위편에 서 있는 내 또래의 청년들이 사회면이든 연예면이든 하루가 멀다 하고 비추인다.

세계 자살예방의 날(매년 9월 10일)을 맞아 지난주 북아일랜드에서 열린 국제자살예방협회 세계학술대회에서는 미국 국립정신보건원의 자료를 토대로 1965∼1995년, 2009∼2012년 사망 원인의 추이가 발표됐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자살 사망률은 줄어들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자살예방센터가 11일 발표한 올해의 자살예방 백서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약간의 감소 추세를 보이나 20대 자살률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청년세대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방향성이 유효한지 의문이다.

특히 한국 청소년 및 청년들과 관련해 눈여겨볼 것은 자존감에 대한 비관적 관점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자존감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자존감 높이는 방법’ ‘자존감 낮은 사람 특징’ 등이 뜬다. 2004년 이후 한국 청년들의 자존감 검색 빈도는 외국과 달리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취업이나 대인관계에서 실패한 이유 중 일부는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 추정하며, 또다시 수치심, 죄책감과 같은 자의식 정서를 생산해낸다.

자기계발서를 위시한 온갖 미디어들은 높은 자존감으로 자기 자신을 ‘무장’하라고 권한다. 시스템의 안정성이나 공정성에 대한 논의도 없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연애를 하려는 사람도, 아이를 키우는 주 양육자도, 심지어 아동도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고 계도한다. 국내 민간 상담사 자격증은 4600개에 달하는데, 대부분 자존감을 높여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렇다고 청년들의 자존감이나 자기애가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다. 밀레니얼 세대가 자기애 경향성이 높을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1990∼2010년대 출생자 2만5412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이들의 자기애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반면 밀레니얼 세대 4만1641명을 조사한 다른 연구에서는 1989년 이후 27년에 걸쳐 개인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선형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니 그 어느 세대보다 자기계발에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진 현재의 청년세대에게 높은 자존감을 추구하는 일이란, 실은 또 다른 과중한 업무다. ‘심리적으로 완벽하게 건강한 나’는 그 자체로 스펙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꽤 괜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이 낮아지는 그 순간의 감정과 생각까지 편안히 수용할 줄 안다. 자기 삶의 궤적이나 자존감 수준을 쉽게 평가절하하는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적 틀에 갇히면 목표를 위해 오랜 기간 인내해야 하는 시기, 혹은 끝내 운이 따르지 않아 실패하는 시기에 건강하지 못한 선택을 하기 쉽다. 모와 도, 그 사이인 개와 걸과 윷 모두가 자기를 구성하는 이야기임을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치고, 형편없이 낮아지는 자존감과 나의 과거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조망하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힘이 생길 때, 높은 자존감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형질을 획득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불안, 당혹, 우울을 경험하며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심리치료들은 자존감 높이기를 치료의 목표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실패나 정신건강 문제를 단순히 자존감 때문이라며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는 자존감 클리셰(예술작품에서 흔히 쓰이는 소재)를 경계해야 한다.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도 그 보상이 확실히 제공될지가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는 개인의 자존감은 낮아지고 병리적인 완벽주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자살의 주요한 위험요인이 된다.

특히 변동성이 높고 불공정한 환경에서 개인 혼자 어떻게든 통제감을 가지기 위해 방어적이고 경직된 태도를 취하다 소진되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전체 한국 사회의 성장 가능성을 해친다. 정부와 국회가 부디 정파의 이해를 떠나 국민들이 삶의 여러 과업에서 때로는 편안히 실패해도 되는 물리적, 정신적 안전장치를 사회 시스템상에서 계속 늘려야 한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청년세대#자살률#세계 자살예방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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