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대통령의 진화를 막는 코드경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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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요즘 ‘변화 논쟁’ 한가운데에 섰다. 대통령이 최저임금 등 경제정책의 속도조절을 얘기하자 찬반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막상 그 후 최저임금법 시행령을 강행하는 등 속도·방향조절은 커녕 오히려 가속페달을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해석은 세 가지다.

첫째, 문 대통령은 변할 의지가 없다는 해석이다. 둘째, 고용노동부 등이 코드를 맞추려 질주하는 바람에 덩달아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세번째는 대통령이 원한 속도조절은 최저임금 인상률을 다소 낮추는 정도였고 시행령 개정은 그것과 무관한 기술적 문제여서 관여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필자는 세 해석 모두를 합친 게 정답이라고 본다. 문 대통령은 이념적 지향성이 강하다. 변화하려면 사고의 프레임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노동부는 예전의 그 곳이 아니다. 보도자료 등에 표기하는 약칭도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바꿨다. 지난해 김영주 장관 때는 MBC 사장 경질에 공헌하며 검찰과 충성 경쟁을 벌였다. 전 정권의 주요 노동정책에 관여했던 간부들은 사직하거나 한직으로 물러났다. 장관의 의원실 비서관이 장관 정책보좌관 자리를 꿰차고 정책 전반을 주물렀다. 그 보좌관은 장관 경질로 그만뒀지만 지금도 민노총 출신이 보좌관으로 있다. 이재갑 현 장관은 정통 관료 출신이어서 균형을 잡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오히려 친노조 성향 구현에 더 앞장선다.

노동부의 어젠다는 원래 노사 양측의 요구를 주고받는 패키지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1997년 추진된 노동법 대개정은 복수노조 허용과 정리해고제 도입 등을 맞바꾸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노동부는 노동계 요구사항들만 추진한다. 이번 최저임금법 시행령이 다룬 ‘최저임금 산정시간’ 문제는 주휴수당제 존폐, 임금체계 개편과 맞물려서 논의해야 할 사안인데, 노동계가 꺼리는 주휴수당제 존폐 논의는 일언반구 않는다. 노동시장 개혁 등도 장기과제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미뤄버렸다.

이달 11일 문 대통령이 노동부 사무실을 방문해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너무 빠르냐?”고 묻자 한 간부는 “온도차가 다를 수 있는데 일단 소상공인들은 어려움을 호소한다”며 “기업들이 감당할 수 있음에도 ‘조금 더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를 낸다는 시각이 일부 있다”고 답했다.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진 지 몇 달째인데, 왕은 “가뭄이 심하냐”고 묻고 신하는 “갈수기엔 늘 이런데 엄살 피운다”고 답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역시 직업공무원(군인)이 장관인 국방부도 최근 정권 핵심 관심사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지난주 국방부 업무보고는 국방부가 ‘9·19 남북 군사합의 이행과 대통령 임기내 전시작전권 전환 완수를 위한 특별추진본부’로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9·19 군사합의가 수반하는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사항들의 보완방안 등은 관심사항이 아니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형 3축 체계 조기 구축 등은 아예 실종됐다. 업무보고에서 ‘북한 위협’ 대신 ‘주변국 잠재적 위협’을 앞세우더니 내년 초 발간될 국방백서에서는 북한을 적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을 아예 삭제할 움직임이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현 정권 들어 합참의장을 거쳐 장관으로 연거푸 발탁됐다.

직업공무원 출신 장관들이 ‘캠코더’(대선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출신) 장관들이 무색할 정도로 코드 정책을 펴는게 권력 핵심부와의 끈의 취약성을 의식해서인지, 감춰왔던 소신의 발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식과 정책 구상의 프레임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잘 아는 참모와 장관들이 고언을 하고 균형을 잡아줘야 하는데, 지금 청와대에는 군부독재시대에 시계가 멈춰버린 선악관의 소유자들이, 내각에는 딸랑이들이 경쟁하고 있다.

변하지 않아야할 초심(初心)이란 어떤 걸까. 문 대통령은 그제 SNS에 올린 성탄메시지에서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 일부를 인용했다.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참으로 아름다운 시다. 할머니의 마음이 솜이불처럼 따뜻하다. 2010년 발표된 이 시를 1984년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과 비교하면 박노해 시인의 ‘진화’를 볼 수 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의 핵심 박노해는 사회주의체제 붕괴 등을 거치며 생명, 땅, 사람, 평화를 강조하는 진보인사로 변했다. ‘변절자’라는 손가락질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진화라고 부른다. 한결같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할머니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이다. 생각은 현실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문재인#경제정책#고용노동부#최저임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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