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배 아픔’에 휘둘려 ‘배고픈 나라’로 가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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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산업계와 금융계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회사 실적이 곤두박질치면서 상당수 임직원이 구조조정 공포에 떨고 있다. 올 2분기에 최악의 적자를 낸 현대중공업은 권오갑 사장 주도로 대규모 임원 감축에 나섰다. 한국의 1등 기업 삼성전자가 ‘과잉 인력’을 걱정한다는 보도도 심상찮은 징후다.

이런 경제현실을 보면서 6년 전 이맘때 덮친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를 떠올린다.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라는 제목이 외신에 등장하던 시기였다. 다행히도 한국은 이명박 정부와 경제계가 힘을 합쳐 비교적 성공적으로 위기를 넘겼다. 해고 태풍이 몰아친 선진국과 달리 실업 대란(大亂)도 없었다.

2008년 가을의 위기가 급성 질환이라면 지금은 만성 질환에 가깝다. 병증(病症)이 만성이라면 치료는 더 어렵다. 우리 경제가 어려울 때 종종 돌파구가 됐던 수출은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다. 고급 서비스업 규제 혁파를 통한 새로운 활로 찾기는 2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이다.

추락이 이어지면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6년 전에는 구본무 LG 회장이 “회사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거나 안 뽑으면 안 된다”며 산업계의 감원 도미노를 저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번에는 기업인의 그런 온정적 발언이 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2014년 경제 불안은 직접적으로는 일본 엔화 약세나 중국 기업의 급성장 같은 외부변수 탓이 크다. 그러나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2008년 위기를 비교적 작은 고통으로 극복한 뒤 광풍(狂風)처럼 몰아닥친 ‘배 아픔 부추기기’의 예고된 결과라고 나는 본다.

세계 각국이 기업 경쟁력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점에 한국에서는 그나마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대기업을 매도하고 때리는 풍조가 유행처럼 번졌다. 나라곳간 사정이나 후유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면 무상급식 같은 포퓰리즘 주장이 힘을 얻었다.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고 기업을 키워봐야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규제밖에 없는 뒤틀린 현실에서 밤잠을 설치는 기업가 정신을 기대하긴 어렵다.

계층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일부 세력이 걸핏하면 들고 나온 ‘재벌과 부자만 감세 혜택을 받았다’는 주장의 실체는 어떤가. 기획재정부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작년까지 대기업은 약 11조 원, 고소득층은 4조 원의 세금 부담이 늘었다. 반면 중소기업과 중산층 이하 계층은 세 부담이 각각 30조 원가량 줄었다. 기재부 통계가 왜곡이 아니라면 그동안 세제(稅制)를 둘러싸고 벌어진 각종 비판과 공격은 얼마나 허망하고 무식한 수준의 산물이었던가.

한국은 1960년대 이후 국가 지도자, 기업인, 공무원, 근로자, 농민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다. ‘배고픔의 극복’을 위해 선택한 국가 전략은 전체적으로 봐서 대성공이었고 대부분의 국민이 크든 작든 성장의 혜택을 입었다. 만약 한국의 개발연대에 ‘배 아픔의 정서’가 다수 국민을 지배했고, 빨치산 출신 경제학자 박현채가 주장하고 적잖은 지식인과 정치인이 맞장구친 ‘민족경제론’ 같은 정책을 택했다면 그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요즘 들어 나는 ‘한국의 국운(國運)은 결국 여기까지가 한계인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할 문제는 ‘하향평준화라도 좋으니 더 평등해지자’가 아니라 자칫하면 빈곤의 터널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경각심이다. 많은 국민이 전교조와 민노총식(式) 이념의 미망에 장기간 휘둘린다면 배고픈 나라로 추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한때 잘나가던 나라가 발전을 가로막는 잘못된 생각의 포로가 돼 무너진 사례는 역사 속에 수없이 많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구조조정#현대중공업#글로벌 금융위기#경제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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