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8>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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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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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1952∼)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 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펄펄 끓는 열정으로 지상에서 붕 떠올라 꿈과 환상을 노래했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의 시인 김승희가 이 땅으로 내려왔다. 가슴이 아리다.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억장 무너지는 현실. 그 서럽고 무서운 삶의 가락을 풀어놓으며, 그래도 어쩔 것이냐, 이겨나가자고! 견디자고, 살아가자고! ‘그래도’, ‘그래도’를 반복하면서, 기죽은 영혼들에게 아마 그만큼이나 기죽은 적 있는 시인은 간곡히 설득한다. 그래도라는 말의 이 절실한 동력!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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