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海戰術…중국,‘소프트 차이나’로 ‘팍스 차이나’ 대망

  • 입력 2008년 4월 29일 02시 58분


“‘中 애국주의’다룬 블록버스터 영화 앞세워 노골적 ‘문화공정’출판계도 역사서 바람…‘소프트 차이나’로 ‘팍스 차이나’대망”

《“난 당신을 위해서 왕위를 버릴 순 있어도 백성들이 고통받게 할 순 없어요.”(연비야·천후이주 분)

“기억하라, 대연국의 전사는 죽을지언정 쓰러지지 않는다.”(대장군 설호·젠츠단 분)―영화 ‘연의 황후’ 중에서

중국이 소프트 차이나(Soft China)로 팍스 차이나(Pax China)를 꿈꾸는가? 화려했던 역사를 소재로 ‘위대한 중국’을 내세운 중국 문화 상품이 쏟아지면서 이 같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른바 ‘신중화주의’를 앞세운 ‘문화공정’이 아니냐는 것. 실제로 중국 문화상품이 밀려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올림픽을 앞둔 최근에는 ‘중국 천하(天下)’를 내세우거나 ‘중국 제국’을 옹호하는 콘텐츠가 급증하고 있다. 27일 서울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를 봉송하던 도중에 일어난 중국인 유학생들의 도심 과격 시위도 이 같은 ‘중국의 애국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 대국을 찬양하는 역사물

대국 이미지를 내세운 역사물은 특히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명장’ ‘집결호’ ‘삼국지, 용의 부활’ ‘연의 황후’ 등 중국발(發) 대하역사 블록버스터 영화가 줄을 이었다. 모두 2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간 데다 리롄제 류더화 리밍 훙진바오 등 중국 톱스타들이 총출동했다.

7월 개봉 예정인 ‘적벽’은 그 정점 중 하나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적벽대전을 소재로 마무리 작업이 한창으로 우위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량차웨이 장첸 주연에 제작진과 엑스트라 등 제작 인력만 2000명이 넘는다. 지금까지 650억 원 이상 투입됐다.

소재를 비롯해 캐릭터가 천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국충정 일색이다. 방청운(영화 ‘명장’)이나 조자룡(‘삼국지, 용의 부활’)은 조국에 봉사하느라 사생활도 희생한다. 심지어 ‘연의 황후’에서 여성 주인공 연비야는 사랑도 포기한 채 조국 수호에 앞장선다.

이 같은 캐릭터 변화는 이전 중국 영화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과거 ‘동방불패’나 ‘소오강호’ 등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멀리했다. 대의를 중시하긴 했지만 강호 질서나 인륜, 도덕이 우선이었다. 영화 평론가 김봉석 씨는 “과거 국가를 부정하는 도교적 인물 위주였던 중국 영화 속 주인공들이 최근엔 국가 권력을 옹호하는 유교적 캐릭터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위대한 중국을 내세우는 역사물 바람은 출판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건웅 차이나하우스 대표는 최근 출판잡지 ‘기획회의’ 221호에서 “최근 장친산 중국예술인민부위원장이 중국 전통문화가 중화 민족의 원동력이라 선포한 뒤 출판계도 중국 대표적 소프트 브랜드인 ‘삼국지’와 ‘공자’가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를 바탕으로 이중톈, 위단, 류짜이푸 등 인기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중국 역사서들이 중국 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 인터넷서점 ‘당당(當當)닷컴’에 따르면 위단 베이징사범대 교수가 쓴 ‘논어심득’과 ‘장자심득’(국내명 ‘장자 멘터링’)이나 이중톈 샤먼대 교수의 ‘품삼국’(국내명 ‘삼국지강의’) 등은 인기 베스트셀러. 모두 유가사상이나 화려했던 중국 역사를 소재로 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중국 출판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자신들이 자랑하는 전통 문화와 역사 중심의 콘텐츠 양상에 힘쓴 것도 한 가지 이유”라고 말했다.

○ 경제에 이어 중국 문화 상품의 시대도?

국내 전문가들은 이처럼 ‘위대한 중국’을 내세운 문화상품이 쏟아지는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후원이 있다고 본다. 화려한 과거를 다룬 역사물을 통해 문화대국 이미지를 심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모두 중국 중심주의의 발로라는 지적이다.

영화 평론가 전찬일 씨는 “중국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현재 제작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중국 정부의 협력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작품”이라며 “소재나 내용이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대국굴기(大國굴起·큰 나라가 산처럼 솟구치며 일어선다는 뜻)’라는 정책 기조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문화콘텐츠의 내용에 따라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다. 황제의 출현을 적극 옹호한 영화 ‘영웅’ 등 중국 문화 정책에 조응하는 성격이 짙은 영화를 만드는 장이머우 감독이나 천카이거 감독은 정부의 후원 아래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중국의 인권 탄압을 비판한 작가는 비난받기도 했다. 최근 영화 ‘색, 계’의 여주인공 탕웨이도 이 영화가 중국 공산당의 적(敵)이었던 국민당을 우호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중국 내 활동을 금지당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위대한 중국을 내세운 문화 상품들이 상당한 파급력을 지닐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량 공세로 세계를 장악한 중국 경제 상품처럼 중국 문화 상품의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장동천 고려대 중어중문과 교수는 “중국이 경제가 부상하면서 스스로 문화적인 자신감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문화도 경제 방식처럼 중앙 집중 권력 아래 조직화된 흐름을 탄 이상 무시 못할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 같은 중국의 문화 바람을 ‘팍스 차이나’의 표출로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오상무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도 사회가 발전하며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등 민족주의 블록버스터 바람이 분 것처럼 중국도 경제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체제 선전보다는 어떤 텍스트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위대한 중국’ 영화 올해 6편이나 개봉

‘위대한 중국’을 전하는 블록버스터가 나온 것은 올해 처음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2002년)을 그 시작으로 꼽는다.

이 영화는 진시황의 천하통일론을 칭송한다. 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시황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접근한 자객이 스스로 임무를 포기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자객 ‘무명’ 역의 리롄제는 “한 명의 고통은 온 천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조(趙)나라의 원한도 천하라는 대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며 제국을 옹호하는 논리를 편다.

이후 연인(2004년), 야연(2006년), 황후화(2007년) 등 중국 황제의 통치권을 정당화하거나 중국 역사의 위대함을 내세운 블록버스터급 역사물이 잇달아 개봉했다.

올해에는 모두 6편의 영화가 상영되었거나 상영될 예정이다. 1년에 한두 편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크게 증가한 셈이다.

7월에 개봉하는 ‘적벽’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주군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인물들을 내세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양권에 낯익은 삼국지를 문화 콘텐츠로 내세우면서 중국중심주의를 메시지로 담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위대한 중국’을 강조하는 영화들이 일제히 개봉하는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평론가 전찬일 씨는 “(일제히 개봉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중국에서 영화는 국가 정책 기조와 맥을 같이하는 매체”라며 “올림픽을 앞두고 중화주의의 우월성 등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평론가 황영미 씨는 “최근 중국 블록버스터급 역사물들은 엄청난 물량 공세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과거에 비해) 인물 캐릭터나 스토리가 단순해지고 중국인들의 ‘뿌리’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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