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단편집 낸 서하진 “엄했던 아버지는 내 소설의 모티브”

  • 입력 2004년 5월 24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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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권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왼쪽)과 딸 하진씨. 서 전 부장은 “어릴 때부터 책 읽느라 밤을 새우던 딸이 아이 셋을 키우며 글 쓰는 걸 보면 고단하게 사는 것 같아 안쓰럽다”고 말했다. 하진씨는 “검사 시절 아버지가 지방근무로 떠돌 때 주말에 서울 집으로 오셔서 우리를 만나고 나면 임지로 내려가기 싫어하시는 것 같았다”며 “그때 참 외로워 보이셨다”고 말했다.-전영한기자션
서동권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왼쪽)과 딸 하진씨. 서 전 부장은 “어릴 때부터 책 읽느라 밤을 새우던 딸이 아이 셋을 키우며 글 쓰는 걸 보면 고단하게 사는 것 같아 안쓰럽다”고 말했다. 하진씨는 “검사 시절 아버지가 지방근무로 떠돌 때 주말에 서울 집으로 오셔서 우리를 만나고 나면 임지로 내려가기 싫어하시는 것 같았다”며 “그때 참 외로워 보이셨다”고 말했다.-전영한기자션
‘제부도’ ‘라벤더 향기’의 작가 서하진씨(44). 최근 그가 창작소설집 ‘비밀’을 펴냈다.

아홉 편의 정밀한 단편들이 수록된 새 창작집 중 ‘뱃전에서’와 ‘미련함에 대하여’에는 눈길을 끄는 아버지 캐릭터가 등장한다.

보수적이며 권위적인 모습으로 작중 주인공인 딸의 삶과 의식을 지배한 아버지. 바로 작가의 실제 아버지에 근접한 캐릭터다. 서씨의 아버지는 6공 때 안기부장을 지낸 서동권 변호사(72)다. 김원일 이문열씨가 자기 문학의 출발점으로 “아버지는 남로당원이었다”고 털어놓았다면 작가 서씨는 이제 “아버지는 엄한 우파였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작가 서씨와 함께 아버지 서 변호사를 만났다. 한사코 만남을 거절하던 서 변호사는 “딸을 위해서”라며 어렵게 딸과의 동반 인터뷰를 받아들였다.

“저는 2남4녀를 키웠어요. 귀가시간을 정해 놓고, 늦으면 쩌렁쩌렁하게 꾸짖곤 했지요. 아이들은 제 말에 토를 못 달았어요. 지내놓고 보니 후회스럽더군요. 더 베풀어줬어야 했는데….”

‘뱃전에서’는 그 아버지와 딸이 함께 다녀온 외국여행 이야기다. 딸은 대학시절 ‘선동가이자 수배자인 한 남자’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가풍(家風)은 그 사랑을 불허하고 안정된 혼처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제 그 ‘안정된 남편’은 밤늦게 여성용 향수를 묻혀 귀가하고, 옛 연인은 얼룩진 정치인이 돼 있을 뿐이다. 딸은 부패해 가는 옛 사랑이 안타까워 이국에서 밤에 몰래 편지를 쓰지만 나이 든 아버지에게서 놀라운 한마디를 듣는다.

작가 서씨는 데뷔 이후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해서는 수용과 반발의 경계에 선 작품들을 섬세한 필치로 써왔지만 결혼을 통해 새로 가부장이 된 남편에 대해서는 ‘법률혼 관계를 깨고 나가는’ 격렬한 저항을 보였다. 타이틀 작품 ‘비밀’은 그런 기혼녀들의 이야기다.

이번 창작집에서 가장 재미있는 작품은 “나는 스물아홉, 아름답고 위험하고 나쁜 여자입니다”로 시작하는 ‘사심(邪心)’이다. 남편을 이용해 돈을 확보하고 애인도 챙기려는 어머니와 딸 2대의 이야기다.

검찰총장을 지내기도 했던 서 변호사는 “법의 길, 문학의 길은 서로 다르다”며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도 불륜이 테마지만 문학의 높은 자리에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하진이한테는 순수문학도 좋지만 대중한테 힘을 가지려면 시속(時俗)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말해 왔지요. 하진이가 창작집을 낼 때마다 30권씩 사서 주위에 나눠줘요.”

작가 서씨는 올해 데뷔 10년째다. 아버지 서씨는 “벌써 그렇게 됐느냐”라며 “‘현대문학’에 첫 작품 ‘그림자 외출’이 실린 걸 보고 기뻤지만 무덤덤하게 축하한다, 한마디만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사실 그때 두 번 놀랐는데, 딸이 처음 필명을 썼어요. ‘서하진(徐河辰)’이라고. 원래는 서덕순(徐德順)이거든요. 좀 촌스럽지요?”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작가 서씨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버지, 그거 ‘비밀’이에요!”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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