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투르게네프 '첫사랑'

  • 입력 2000년 7월 31일 14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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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룔의 둥지와 한니발의 맹세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는 1818년10월 28일(신력으론 11월 9일)에 중부 러시아의 아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루토비노브나는 스파스코예의 오래된 귀족 가문인 루토비노프가의 핏줄을 타고났고,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는 영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장교(중위)였다. 명문귀족과 사돈을 맺어 집안을 일으키려는 부친의 강권에 못 이겨 투르게네프의 아버지 세르게이는 여섯 살이나 연상이었던 바르바라와 1816년 결혼한다.

어머니는 계부 밑에서 학대와 모욕을 받으며 자라다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거부가 됐는데, 서른 다섯살 때까지 죄수와 같은 박해를 당하며 자라 신경질적이고 성격이 거칠었다. 사랑없이 결혼한 세르게이 투르게네프와 정략적으로 이룬 가정은 언제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투르게네프가 농노제도의 가장 나쁜 형태를 목격한 것도 바로 거칠고 난폭한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당시 귀족들이 보통 그랬듯 투르게네프도 훌륭한 가정교육 덕분에 중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3개 국어(영어,독어,불어)로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다. 1827년 초, 투르게네프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이사하고, 투르게네프는 1833년 9월에 모스크바 대학 철학부 언어-문학과에 입학한다. 모스크바 대학은 새로운 세기를 앞둔 러시아의 진보적 젊은이들의 요람이었다. 이곳에서 투르게네프는 "죽을 때까지 농노제도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고 농노제도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한니발의 맹세'를 가슴에 품는다. 이것은 투르게네프 개인에 머무는 맹세가 아니라 당시 진보적 젊은이들의 서원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투르게네프는 계몽과 교육과 이성의 힘을 신봉하는 서구주의자의 면모를 갖춘다. 1834년 가족이 제국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그로 이사하면서, 이 해 7월 투르게네프는 페테르부르그 대학 철학부 철학과로 전과한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투르게네프가 진보적인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면 페테르부르그 대학에서는뮤즈의 세례를 받아 문학청년으로 거듭 난다.

◆프랑스 여가수와 기이한 삼각관계

1838년 5월 투르게네프는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당시 독일은 니콜라이 1세의 반동적 국내 정치에 부정적이었던 러시아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망명처와도 같았다. 특히 베를린 대학은 러시아의 젊은 이상주의자들의 신이었던 헤겔의 전당이었다. 베를린에서 투르게네프는 모스크바 대학시절의 친구인 그라노프스키를 다시 만났고, 그를 통해 N.V.스탄케비치와 다른 러시아의 이상주의자들과 사귈 수 있었다. 서구주의자들의 친구가 된 토르게네프는 러시아의 서구화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절감하고 이런 그의 생각은 작품 속에서 러시아를 해방시켜줄 '적극적 영웅'들을 갈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841년, 베를린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투르게네프는 교수의 꿈을 접고 잠시 내무부 관료로 일한다(1843). 그런데 이즈음 만난 프랑스의 여가수 폴리나 비아르도와의 사랑은 투르게네프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와 만난 1843년 11월 1일을 투르게네프는 '성스러운 날'이라고 부를 정도다. 당시 그녀는 22세로 이미 결혼한 여자였다. 폴리나의 남편 루이 비아르도는 투르게네프만큼이나 사냥을 좋아하는 문학애호가로 곧 투르게네프와 친구가 됐다.

이후 러시아에서 비아르도 부부는 투르게네프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프랑스에서는 투르게네프가 종종 비아르도의 집에서 같이 살면서 사랑과 우정을 나눴다. 이들의 이상한 동거와 삼각관계에 대해서는 무성한 소문이 나돌았지만, 이들의 관계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증거나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이들의 우정과 신뢰가 얼마나 돈독했던지 투르게네프가 어머니의 하녀 아브도티야와의 사이에서 얻은 여덟 살 난 딸 팔레게야를 폴리나로 개명해 비아르도 부부에게 맡길 정도였다(1850년).

폴리나를 향한 투르게네프의 사랑은 참으로 이상해서 마치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성스러운 숭배를 간직한 중세 기사의 사랑 같았다.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투르게네프는 무엇보다 폴리나의 음악적 재능의 포로이자 숭배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 즉 예술에 대한 믿음이자 신앙이기도 했다. 폴리나도 투르게네프의 예술적 재능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투르게네프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그를 격려했으며, 때론 좋은 독자로서 작품에 대한 느낌과 다양한 의견을 솔직하게 제시했다. 투르게네프는 죽을 때가지 폴리나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간직한채 그녀 곁을 맴돌다가 사랑하는 여인이 나고 자란 땅 프랑스의 부기발에서 폴리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1883. 8. 22).

◆벨린스키와의 만남과 작가의 길

대학시절 이후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창작을 줄곧 해왔지만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지 못했던 투르게네프는 서사시 《파라샤》(1843년)에 대한 벨린스키의 호평과 격려에 큰 용기를 얻었다. 그제야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고 본격적인 창작의 길로 들어섰다. 투르게네프가 내무성 관리 일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벨린스키 주변에는 당시 내노라 하는 작가들이 운집해 있었다. 투르게네프는 그 곁에서 게르첸, 네크라소프, 곤차로프, 그리고로비치와 사귀었다.

벨린스키가 주도했던 러시아 문단의 새로운 흐름, 이른바 '자연파(비판적 리얼리즘)'의 여러 작가들과 가까워지면서 투르게네프는 낭만적 서정시인에서 시골과 농민들의 모습을 진실하게 그린 작가로 변모했다.

그 대표적 작품이 바로 《사냥꾼의 수기》(1852)다. 사냥꾼의 수기는 자신의 영지에 거주하는 농노의 현명함을 깨닫는 젊은 귀족 이야기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으로 '독일이라는 바다'의 철학적-낭만적 파도에서 헤엄쳐나와 가혹한 농노제도와 차리즘이 지배하는 러시아를 직시하게 됐다.

농노제에 대한 시적 폭로인《사냥꾼의 수기》 이후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현실의 연대기적 기록자라 불릴 정도로 '시대의 형상과 그 중압감'을, 특히 러시아 사회의 민감하고 핵심적 문제들을 러시아 교양계층인들의 유형 속에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루진》(1856)에는 1840년대 귀족 들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담겨있고, 《귀족의 보금자리》(1859)에는 충돌하는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문제가, 《전날 밤》(1860)에는 농노해방 전야의 러시아의 사회·정치적 상황이,《아버지와 아들》에는 잡계급 출신의 민주주의자들(니힐리스트)의 문제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연기》에는 농노해방 후 러시아 사회의 진로에 대한 각 정파의 논쟁과 갈등이, 《처녀지》에는 1870년대 인민주의 운동이 섬세하게 반영돼 있다.

이런 투르게네프의 작품 성향으로 그는 자연스레 좌우파의 이념논쟁에 휘말렸다. 자유로운 사고와 창작을 억압하고 가혹한 검열이 지배하는 답답한 사회현실, 이념적 줄서기를 강요하고 흑백논리가 난무하는 러시아의 지적 풍토에 환멸을 느낀 투르게네프는 1861년 9월 파리로 떠난다. 그후 아주 드물게 귀국해 짧은 일정을 보낸 것을 제외하고 투르게네프는 죽을 때까지 긴긴 방랑생활을 하며 외국을 떠돈다.

유럽에서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대사'로 불릴 정도로 유럽의 많은 작가들(공쿠르 형제, 메리메, 플로베르, 졸라, 도데, 위고, 모파상, 롤스톤, 조르주 상드, 헨리 제임스)과 교류하면서 푸쉬킨을 비롯한 여러 러시아 작가들을 번역하며 러시아 문학를 해외에 적극 소개했다. 해외에 머무는 동안 투르게네프는 사회-정치적 문제가 아닌 인간의 알 수 없는 내면세계와 일상세계를 그린 일련의 중단편들(〈여단장〉,〈불행한 여인〉,〈초원의 리어왕〉,〈똑...똑...똑!...〉,〈이상한 이야기〉,〈봄물〉,〈시계〉,〈꿈〉)을 써낸다. 그러나 스스로 고백하듯 투르게네프는 한시도 조국과 아룔의 고향산천을 잊은 적이 없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대학 입시를 준비중인 열 여섯 살의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우연히 이웃에 사는 가난한 공작부인의 딸인 지나이다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스물 한 살의 지나이다는 개성이 강하고 적극적인 처녀다. 그녀는 자신을 숭배하는 뭇 남성들을 재치있는 말과 위엄있는 행동으로 꼼짝 못하게 만든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의 마음에 들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그녀는 블라지미르를 때론 동생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냥 우호적으로 대할 뿐이다.

지나이다의 숭배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따로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블라디미르는 가슴에 칼을 품고 야심한 밤에 정원에서 연적을 기다린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적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발견한 블라지미르는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인다. 어느 날 블라지미르는 아버지가 지나이다를 채찍으로 때리고, 지나이다가 그 채찍을 조용히 맞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The more

이항재<단국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 북코스모스 가이드북 필자> http://www.bookcosm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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