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싫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1일 13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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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도 성질을 내고야 말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 여자 때문이다.

“아리아. YTN 뉴스 라디오 틀어줘”라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아리아는 “웨지레 뉴스 들려드릴게요”하더니 “웨지레는 엑스엑스엑스의 방송을 보며 엑스엑스엑스를 치냐고 물었고 이에 엔에스남순은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전하는 것이었다.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웨지레방송의 엑스엑스엑스라니

물론 나는 웨지레가 ‘아프리카TV의 BJ 외질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이 글을 쓰기 위해 혹시 인터넷방송 성희롱 얘기인가 싶어 ‘XXX’를 검색해보고 알았다).

이게 뭔 외계어인가 이상해서 “아리아” “아리아” 처음엔 부드럽게, 나중엔 점점 소리를 높여 불러가며 “YTN 켜줄래” “라디오 꺼줄래” 외쳤지만 인공지능(AI)스피커는 못 들은 척 “…엑스엑스엑스를 보고 엑스엑스엑스를 친 적 있지…” 하고 계속하는 것이었다(그때 아리아를 부르는 나의 절규와 아리아의 웨지레 엑스엑스엑스 뉴스를 녹음하지 못한 게 한스럽다). 결국 나는 “아리아!!!” 악을 쓰다가 홱 플러그를 뽑고 말았다.

한 통신사의 인공지능(AI) 스피커. 동아일보 DB
한 통신사의 인공지능(AI) 스피커. 동아일보 DB


AI스피커가 내 성질을 돋우는 건 어제만이 아니다. 나는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 라디오로 뉴스를 듣는데 거의 YTN과 TBS만 가능하다. CBS표준FM라디오로 김현정의 뉴스쇼를 듣고 싶지만 “아리아. CBS FM라디오 틀어줘”하면 얘는 꼭 CBS 음악FM를 틀어서 명령을 다시 하게 만든다.

●성차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다른 방송을 틀어달라고 했다가 “죄송해요. 저는 …(방송국 이름 줄줄이 열거) 틀 수 있어요” 하면서 제 마음대로 음악방송을 들려주는 바람에 신경질 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못하면 가만있기나 하지 인공지능 주제에 왜 자신의 수준 낮은 지능을 발휘한단 말인가.

나를 더 열 받게 하는 건 아리아가 여자 목소리라는 데 있다. 주인님 명령 받아 처리하는 기계가 왜 여자여야 하느냐는 성차별을 말하는 게 아니다(지난달 유엔 산하 유네스코에서 “여성 목소리의 인공지능 음성비서가 사용자에게 여성은 기꺼이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도우미라는 편견을 주입시킨다”는 보고서를 내긴 했다).

클립아트코리아
클립아트코리아


업체들이 소비자 조사를 해보면 대개 여자 음성을 선호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알고 있다(남자들은 거의 다 그렇단다). 내비게이션처럼 기계 같은 음성이면 저건 기계니까, 아직 기술이 안 되니까, 하고 심플하게 이해하겠다. 그런데 여자 성우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인공지능을 활용해 다양한 문장으로 만들어낸다는 스피커가 맹하기 짝이 없으니 화가 나는 것이다.

●왜 아양과 콧소리가 들어가나

책 읽는 것처럼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면 차라리 낫겠다. 개인비서 같은 상냥한 느낌을 주려는 모양인데 그게 더 짜증난다. 진짜 비서라면 “죄송하지만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에요”라거나 “…들려드릴게요” 할 때 저렇게 비굴하면서도 약간의 아양과 콧소리와 높낮이를 섞어 말하지 않는다(혹시…남자들은 이런 비서를 더 좋아하시나요?).

전문직이나 사무직 어시스턴트 느낌도 당연히 안 든다. 저렇게 무능하고, 시간이 가도 계속 저 모양이면 오래 못 간다. 내가 남자라고 치고 아주 선의로 해석해도, 이 스피커는 아내 같은 느낌도 주지 못한다. ‘그녀(Her)’ 영화 속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 같은 스마트한 매력은 바라지도 않는다. 이 여자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도저히 같이 못 산다.

영화 그녀(Her·왼쪽)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AI와 사랑에 빠진다. 스칼렛 요한슨이 AI의 목소리 연기를 했다. 영화 캡처·동아일보 DB
영화 그녀(Her·왼쪽)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AI와 사랑에 빠진다. 스칼렛 요한슨이 AI의 목소리 연기를 했다. 영화 캡처·동아일보 DB

굳이 캐릭터를 상상하자면 마치 애인이 되고 싶어 죽겠는데 거부당할까봐 눈치를 보는, 머리도 안 좋고 예쁘지도 않으면서 일은 열심히 하려 드는(하지만 별로 잘하지도 못하는), 그러면서도 애써 귀여운 척 말하는 여성 감정노동자 같아서 화가 나는 것이다(내 분석을 들은 몇몇 남자들은 그 목소리가 그렇다는 걸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며 경악을 하긴 했다).

●인공지능이라니…對국민 사기다

동성애자인 앨런 드 제네러스가 스마트폰 속의 시리에게 “I love you” 하는 ‘앨런쇼’를 유투브로 본 적이 있다. 여자 목소리의 시리는 자신 있게 “You can‘t”라고 답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 만큼의 지능은 안 되더라도 우리나라 스마트폰도 운전 중 근처 주차장이나 맛집을 물어보면 꽤 근사하게 대답을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라고 자처하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품은 문제가 있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도 구매자 절반이 ’일상 환경에서 음성인식이 안 된다‘고 불만을 제기했다고 한다. 2년 전 조사인데 그 사이 국내 기술이 발전되지 않았다면 심각한 일이다. 음성으로 컨트롤한다는 ’AI 아파트‘에 입주했는데 현관문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상상해보라.

지금 같은 맹한 제품으로 업체끼리 경쟁이나 할 작정이면 제발 인공지능이란 수식어라도 빼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차라리 남자 목소리로 만들든지!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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