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진의 필적]〈10〉대범한 지략가 손병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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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의 글씨. 1904년, 34×133cm
손병희의 글씨. 1904년, 34×133cm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는 일제에 체포돼 옥중에서 뇌출혈을 얻고 결국 사망에 이른다. 장례식에 10대의 자동차, 200대가 넘는 인력거, 5000명이 넘는 사람이 그의 영구를 뒤따랐다고 하니 얼마나 존경받았는지 알 수 있다. 손병희는 보기 드문 큰 인물이었다.

손병희의 글씨는 꽤 커서 용기와 호방함을 알려준다. 그는 말단 관리의 서자로 태어나 어릴 적에는 학문과 담을 쌓은 채 싸움을 잘했고 의리가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돈 100냥이 없어 감옥에서 사형당할 처지가 되자 그는 아버지 손두흥의 문갑을 남몰래 열어주고 돈을 가져가게 했다고 전해진다. 22세에 동학에 들어간 손병희(북접)는 전봉준(남접)과 투합해 동학혁명을 주도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술 대작을 벌이며 호방함을 잃지 않았다.

글씨가 매우 힘차서 마치 밖으로 솟구쳐 비상할 듯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국제 정세를 읽고 정치 수완을 발휘할 줄 알았던 지략가의 글씨답다. 그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일본이 승리할 것을 예견하고는 조선도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해 일본과 함께 전승국의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일본 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려고도 했다. 이는 일본의 힘을 빌려 러시아와 일본 양쪽을 견제하겠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의 글씨는 정확하게 정사각형을 이루면서 각이 뚜렷하고 선이 분명하게 이어진다. 보수적임을 의미하는데 그는 당시 조정의 부패와 밀려들어오는 외세를 척결해야 한다는 반봉건, 반외세주의자였다. 해독에 10년이나 걸린 이 글씨는 ‘龍過江(용과강) 必有風(필유풍) 信鳳人(신봉인)’으로 보인다. 용이 강을 건너니 바람이 불게 마련이지만 반드시 큰 인물이 있다. 즉, 조선에 큰 변화가 있어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낼 큰 인물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봉황은 중국인들조차 ‘동방조선에만 나타나는 상서로운 영물’로 신성시했다.
 
구본진 변호사·필적 연구가
#손병희#필적#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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