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소리꾼가객 장사익의 ‘고향 뒷동산(삼봉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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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동산 찔레꽃 그 향기가 너무 서러워 목놓아 울었지유!

고향 뒷동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장사익. 등 뒤로 아차산과 오서산이 겹주름으로 서있다. 장사익을 키운 건 팔할이 고향의 갯물 냄새와 새우젓국 냄새 그리고 쪼글쪼글한 갯벌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낮게, 낮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살았다. 홍성=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고향 뒷동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장사익. 등 뒤로 아차산과 오서산이 겹주름으로 서있다. 장사익을 키운 건 팔할이 고향의 갯물 냄새와 새우젓국 냄새 그리고 쪼글쪼글한 갯벌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낮게, 낮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살았다. 홍성=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소리꾼가객’ 장사익(64)을 키운 건 팔할이 고향 광천(충남 홍성)이었다. 짭조름한 새우젓국 냄새와 쪼글쪼글 어머니 빈젖 같은 갯벌이 그를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 열다섯까지 살았다. 그의 집 뒤에는 산이 첩첩 ‘3겹 주름’으로 병풍을 서고 있다. 바로 뒷동산이 봉우리 3개의 야트막한 삼봉산이고, 그 너머가 제법 ‘깔딱 고개’로 이름난 아차산, 그 뒤 우람하게 우뚝 서 있는 것이 오서산(烏棲山·791m)이다. 오서산은 어린 그에게 백두산이었다. 멀리 바라보이지만 너무 높아 갈 수 없는 산. 까마귀가 많이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그 산에 오르면 서해바다 물결이 발아래 윤슬로 반짝반짝 뒤척이고, 늦가을이면 능선에 하얀 억새꽃이 춤을 추었다. 그러다 겨울이면 산꼬대바람이 광천읍내로 불어와 맵차게 뺨을 때렸다. 날마다 해와 달이 오서산 잔등에서 돋아나 장사익의 둥근 초가지붕과 둑길을 넘어 서해바다로 꽃처럼 이울었다.

5년동안 새벽마다 뒷산 올라 노래 반, 소리 반

“해마다 정월 초이틀이면 우리 삼봉마을(60여 호) 사람들이 뒷동산에서 당제를 지냈다. 그때 그 꽹과리, 장구, 북, 징소리가 아직도 귀에 앵앵, 꼼지락꼼지락, 달짝지근하게 감겨온다. 뭔가 살아 숨쉬는 것 같고, 엉덩이 들썩들썩, 어깨춤 덩실덩실, 흥이 얼쑤덜쑤…난 어릴 적 5년 동안(초5∼중3) 하루도 빠짐없이 동녘 오서산 잔등에 햇귀가 걸릴 쯤이면 뒷동산에 올라 소리를 내질렀다. 내 깜냥으론 웅변 연습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어쩐지 마냥 좋아서였다. 어스름 새벽이라 무섭기도 했다. 당제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인 데다가 바로 산자락 아래가 수많은 밥사발이 엎어져 있는 공동묘지였다. 게다가 대낮에도 오금이 저리는 상엿집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봄이면 온통 진달래꽃으로 붉게 출렁이고 가을이면 억새꽃이 서걱서걱 울어댔다. 난 ‘야아아아∼야야∼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야아아∼아아∼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오호 호오이∼구신 할아버지! 어디 기신대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고 되나캐나 뒤죽박죽 ‘노래 반, 소리 반’ 질러댔다. 그렇게 한두 시간 목을 쓰다 보면 마을 앞 줌뱅이뜰에 안개가 스르르 걷히고, 동네 아침밥 짓는 냄새와 큼큼한 갯물 냄새가 코에 가득 밀려왔다.”

장사익의 아버지는 광천 최고의 ‘장구재비’였다. 읍에 무슨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단골로 앞장섰다. 그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의 친구들은 그들 아버지가 그럴 경우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했지만, 장사익은 신바람이 나서 아버지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아버지가 정월 초이틀부터 대보름까지 동네 경비를 마련하려 광천읍내 집집마다 걸립(풍물패가 축원 액풀이 등을 해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일)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몰랐고, 해가 기울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집 앞 뚝방 끄트머리에 김관섭 아저씨가 살았다. 그분은 해거름 녘이면 새납(태평소, 날라리, 호적, 쇄납), 일종의 쌍피리를 불었는데 구슬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동네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어린 나도 애간장이 녹고, 가슴속이 아리고, 어찌나 슬픈지 저절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새납 소리가 들리면 밥 먹다가도 일어나 아저씨한테 달려갔다. 다른 아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난 그 아저씨 곁에 꼭 붙어 앉아 그 소리에 넋을 잃었다. 또 뚝방 너머가 광천시장이었는데 옛날 배가 들락거릴 땐 엄청 큰 장이 섰다. 그 뚝방길로 장꾼들이 무시로 오갔고 가끔 꽃상여도 지나갔다. 그때마다 장터엔 쇼단, 가설극단, 광대 뜨내기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네들은 우르르 몰려왔다가 한판 거방지게 놀고 휑하니 사라지곤 했다. 난 그들 주위를 뱅뱅거리거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가슴속 주체할 수 없이 차고 넘치는 흥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장사익은 가수가 된다거나 하는 거창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노래가 좋아 단 한 번도 그 끈을 놓지 않았을 뿐이었다. 1967년 첫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매달 월급의 반을 털어 낙원동의 한동훈가요학원에 다닌 것도 그랬다. 그는 그곳에서 3년 동안 코드, 발성 등 모든 것을 배웠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 하나 가지고 일주일 동안 연습한 뒤 그걸 녹음해 들어보는 식이었다. 군입대 직전엔 ‘대답이 없네’라는 트로트도 한 곡 취입했다. 두 달 월급이 들어갔다. 남의 곡 뒤에 양념으로 슬쩍 끼워 넣은 것인데, 지금 들어보면 ‘범생이가 부르는 애국가’ 같아 웃음보가 터진다.

어쨌든 그 힘으로 군대도 31사단 문선대에 갈 수 있었다. 노래 오디션을 봤는데 거뜬히 합격했다. 막상 입대하고 보니 고참 하나가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트로트 하다가는 군대생활 내내 고생할 게 뻔했다. 그는 잽싸게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6개월 동안 죽어라 연습해서 세미트로트인 ‘봄비’ ‘마음은 집시’ ‘딜라일라’ ‘최진사댁 셋째딸’을 불렀다. 결국 제대할 땐 그가 라스트를 끊었다. 주변 고등학생들이 ‘31사단 봄비아저씨’에게 팬레터를 보낼 정도였다.

“제대하고서도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릴 적 소리와 가락이 몸에 배어 있어 본능적으로 사회생활 틈틈이 단소, 피리, 대금 새납을 배웠을 뿐이다. 그러다가 1992년 카센터 생활을 할 때였는데 문득 ‘이게 아닌데…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래서 ‘좋다, 딱 3년만 새납에 목숨을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그 뒤 미친 듯이 연습을 했다.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할까봐 한강시민공원으로 빠지는 잠실 토끼굴에서 불고 또 불어댔다. 그 이듬해엔 이광수사물놀이패와 함께했다. 양념에 불과했지만 나를 끼워줘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저 밥만 먹여줘도 행복했다. 난 그때 ‘공연 뒤풀이의 꽃’이었다. ‘봄비’를 부르면 사물놀이패 모두가 배꼽을 잡으며 엎어지고, 고꾸라지고, 자지러졌다.”

장사익이 희망의 싹을 본 것은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였다. 당시 그는 장원을 했던 금산농악패의 태평소 멤버로 참가했는데 심사위원이던 대금명인 이생강 선생(1937∼)으로부터 ‘너 소리 참 좋다’는 칭찬을 먹은 것이다. 그 순간 그는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히고, 행복감에 가슴이 빠개질 것 같았다. 서태지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분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1월 홍대 앞에서 데뷔공연을 가졌다. 아우처럼 지내던 ‘야생 피아니스트’ 임동창(1956∼)의 부추김이 큰 힘이 됐다. 그는 “형, 나가! 나가봐! 한번 저질러봐!”라며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노래 ‘찔레꽃’도 순전히 그의 부추김 덕분이었다. 100석 정도의 조그만 공연장에 이틀 동안 무려 800여 명이 들어찼다. 완전 대박! 너무너무 행복했다. 마침내 마흔다섯에 ‘늦깎이 가수’가 된 것이다. 그해 1994년은 ‘터질 것은 다 터진 해’였다.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서태지 대통령’과 농구대잔치 ‘이상민 오빠부대’가 열광했다. 박찬호의 1승에 환호하고, 김건모 ‘핑계’와 영화 ‘태백산맥’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장사익은 그 아수라 세상의 틈새를 비집고 삐죽이 연둣빛 싹을 틔워 올렸다. 장사익은 딱 2년 뒤인 1996년 1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내년 가을에 다시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20주년 공연마당을 펼친다.

내 노래 속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내 지나온 삶은 노래라는 집을 짓기 위해 나도 모르게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온 흔적 같다. 그 당시엔 잘 몰랐지만 하루하루의 삶이 훗날 하나의 큰 건축물이 되었다. 마침 난 운명적으로 음악이라는 끈을 한시도 놓지 않고 있었다. 노래하기 전 나의 옛 사진들엔 웃는 모습이 거의 없다. 그 이후 사진에서야 비로소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인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대추 한 알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들어 있다’는 말을. 내 노래에도 시인의 말처럼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날’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장사익의 노래는 재즈와 국악과 가요를 넘나든다. 막걸리 소리의 대안가수이자 토속 재즈싱어다. 구성져서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듣기만 해도 참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두루마기 차림에 듬성듬성 희끗희끗한 수염. 어깨 살짝살짝 너풀너풀 여릿한 춤사위. 목울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음과 음 사이를 흥과 슬픔으로 진하게 버무린다. 그의 노래는 굳이 반주가 필요 없다. 한순간에 박자를 해체해 버린다. 바람소리, 새소리, 파도소리, 이 세상 모든 소리가 반주다. 지국총지국총! 배 젓는 소리나, 왁자지껄 시장바닥 소리도 함께 어우러진다. 광천 새우젓국 같은 소리가 때로는 걸쭉하게, 때로는 창자가 다 쏟아져 나올 듯이 배어나온다.

이 세상 누가 장미꽃인생을 바라지 않을까. 그는 논두렁밭두렁에 피는 찔레꽃인생을 살았다. 그냥 슬퍼서 밤새워 목 놓아 울었다. 무화과처럼 ‘열매 속에 속 꽃’을 피우며 진한 속울음을 울었다. 그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년이 걸린다’(서정춘 시인의 ‘죽편1-여행’). 그는 이 시를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꺼이꺼이’ 뭉툭하게 불렀다.

인쇄골목 사원→가구점원→복덕방 직원→포장마차 장사→독서실 운영→카센터 직원…
장사익의 15가지 직업열전

[1]사물놀이패와 태평소를 부는 장사익(오른쪽) [2]임동창과 노래 열창(왼쪽) [3]1970년 첫 노래 음반 [4]카센터 시절 [5]장사익이 쓴 백년가약서. 장사익 씨 제공
[1]사물놀이패와 태평소를 부는 장사익(오른쪽) [2]임동창과 노래 열창(왼쪽) [3]1970년 첫 노래 음반 [4]카센터 시절 [5]장사익이 쓴 백년가약서. 장사익 씨 제공
장사익은 은행원이 되는 게 최고 꿈이었다. 헌데 숫자나 셈엔 원체 젬병이었다. 선린상고 시절 다른 애들이 주산을 2, 3단 놓을 때 그는 기껏 2급 실력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은행은 꿈의 직장이라 전국의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다 몰렸다. 장사익도 국민은행 시험을 봤지만 여지없이 미끄러졌다.

고3 가을 보험회사 고려생명에 들어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그 회사 수금과에서 모집인 아줌마 60∼70명을 거느리며 군입대(1970년 6월)까지 그럭저럭 사회생활에 적응해갔다.

문제는 군에서 제대(1972년 8월)한 이후였다. 회사가 사라져 복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뒤부터 그는 무려 15개가 넘는 직업을 전전했다. 무역회사 일신직물에서 신용장 개설업무를 1년 동안 본 것을 시작으로 중소 여우털가공업체 무역업무(석 달)→서울 을지로 인쇄골목의 인쇄용지판매업체 사원(넉 달)→금성알프스전자 영업사원(5년)→가구점 점원→가구점 납품업체 운영(1년)→다시 가구점 점원→한국행동과학연구소 경리과장(1년)→세운상가 발광다이오드업체 점원(1년)→복덕방 직원(석 달)→해수욕장 포장마차(한 달)→독서실 운영(3년)→무역상(1년)→카센터 사무장(3년)….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붕! 공중에 뜬 ‘뿌리 없는 인생’이었다. 그냥 겉만 번드레한 ‘똥 폼’이었다. 매제가 운영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중국성 옆 카센터 시절엔 말이 사무장이지 완전 허드레꾼이었다. 세차, 바닥청소, 심부름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는 손님의 자동차 문을 딱 여는 순간 한눈에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아봤다. 차 안에 비치된 카세트테이프를 보고 나이, 직업, 취미, 성격까지 훤히 꿰뚫었다. 내심 클래식테이프가 보일 땐 85점, 국악이나 재즈 테이프가 있으면 90점을 줬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국악, 재즈 애호 손님과 대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일은 하면서도 마음은 전혀 딴 데 있었던 것이다.

카센터 시절 그 가게의 최고 VIP 손님은 가수 유열(1961∼)이었다. 그는 1986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라는 발라드 곡으로 MBC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당시 그의 인기는 최고였다. 이수만 이문세와 더불어 얼굴이 말을 닮은 ‘마삼 트리오’로도 유명했다.

가수 유열이 어느 날 그랜저 새 차를 뽑아 카센터에 왔다. 코팅(도장)을 새로 하기 위해서였다. 장사익이 호기롭게 나섰다. 미안한 마음에 밥값을 좀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그동안 기술자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보아둔 게 있었다. 코팅은 처음엔 순조로웠다. 그랜저 앞부분은 그럭저럭 고르게 잘 됐다. 하지만 뒤 트렁크 부분에서 결정적인 흠이 나버렸다. 한순간에 새 차가 중고차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장사익은 ‘멘붕’이 돼버렸다. 유열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허∼참”만 연발했다.

훗날 장사익은 가수들 공연명단에 유열이 있으면 가수대기실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뱅뱅 돌았다. 자기 차례가 오면 얼른 노래를 마치고 잽싸게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몇 번, 결국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장사익이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 “혹시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유열은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카센터….” “아하∼, 풋! 우하하!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길고도,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출생 △광동초등학교(1962년)-광천중학교(1965년)-선린상고 졸업(1968년) △1967년 고3 때 고려생명 입사 △1967년 입사 후 낙원동 ‘한동훈가요학원’ 다님(3년) △1970년 봄 트로트 ‘대답이 없네’ 취입 △1970년 6월∼1972년 8월 군복무 △1981년 강영근에게 정악 피리 사사 △1986년 원장현에게 산조대금, 태평소 사사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공주농악’(태평소) △1993년 전국민속경연대회 대통령상 ‘결성농요’(태평소)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금산농악’(태평소) △1994년 11월 홍대 앞 예(藝)극장 ‘장사익소리판-하늘가는 길’ 초연 △1995년 첫 앨범 ‘하늘가는 길’ 출반 △1995년 KBS국악대상 ‘뜬쇠사물놀이’(태평소) △1996년 세종문화회관 단독 콘서트(장사익소리판-하늘 가는 길) △1996년 KBS 국악대상 금상 ‘뿌리패사물놀이’(태평소) △2006년 국회대중문화 미디어대상 국악상

홍성군 광천읍=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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