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심규선]욱일기 트라우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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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매스컴은 아사히신문에 ‘당신네는 군국주의입니까?’라고 취재했더라면 좋았을걸.” 구로다 가쓰히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 주재 특별기자 겸 논설위원이 두 달 전에 낸 ‘한국 반일감정의 정체’라는 책의 한 구절이다. 그는 30년간 한국에서 기자로 살고 있다. 한국에 우호적 논조를 펼쳐온 일본 아사히신문의 사기(社旗)조차 욱일기(旭日旗) 문양을 쓰고 있는데 왜 트집을 잡느냐고 반박한 것이다.

▷욱일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 가운데의 붉은 태양(日)에서 아침 햇살(욱광·旭光)이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했다. 구로다 기자는 “독일의 ‘하켄크로이츠’는 나치만 사용했으나 일본의 욱일은 군대 외에도 폭넓게 사용돼 왔다.…꼭 군국주의의 심벌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당시 욱일기는 군국주의 일본의 대표 심벌이었다. 일본이 ‘종전일’이라고 부르는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 옛 군복 차림으로 참배 오는 사람들은 요즘도 일장기가 아니라 욱일기를 흔든다. 이 깃발의 의미를 일본인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깃발 아래 침략을 당한 나라들엔 욱일기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까지 있는데 별것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요즘 욱일기 뉴스가 잦다.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일본 정부는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욱일기를 소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지난해 8월 영국 런던 올림픽 축구 3, 4위전이 끝난 후 박종우 선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세리머니를 해 소동이 벌어지자 한국 언론은 일본 체조선수의 욱일기 문양 유니폼을 문제 삼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 여자축구 한일전 때도 욱일기가 등장해 논란이 됐다.

▷지난달 28일 서울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한국 응원단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플래카드를, 일본 응원단은 대형 욱일기를 흔들었다. 이 갈등은 정부 차원으로 비화됐다. 스포츠를 내셔널리즘으로 오염시켜선 안 된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다. 한국의 민도(民度)를 운위하는 일본이라면 욱일기를 자국 팀끼리의 경기에서만 사용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으니 문제 아닌가.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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