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한명숙의 ‘한풀이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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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5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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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우리가 알던 한명숙이 아니다.”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를 부드러운 리더십의 소유자로 믿었던 이들 사이에서 억 소리가 나오는 모양이다. 지난 주말 발표된 공천심사위원 15명 중 절반 이상이 대표 경선 때 자신을 지지했거나 특정 학맥과 단체 출신의 자기사람이다. 이명박 대통령(MB)의 ‘고소영’ 인사 뺨치는 ‘이노수(이화여대·친노·수도권)’ 인사라 해도 할말 없을 정도다.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라는 자서전 제목처럼 한명숙은 선하고 편안한 이미지로 유명했다. 지난 정권에서 첫 여성총리를 하면서도 화합과 소통의 리더십을 강조했고, 이번 경선 때도 “나는 (박근혜와는 달리) 거머쥘 것도 없고 욕심을 부릴 이유도 없는 사람”이라며 사심 없는 ‘어머니의 리더십’을 내세웠다. 민주당 통합의 막후 실력자로 알려진 이해찬이나 정세균이 그를 적극 지지하고 손학규 박지원 같은 당내 거물들이 반대하지 않은 데는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그 이미지 덕이 컸다.

하지만 좋게 말해 관리형 대표로 적임이지, 실은 만만해 보인다고 해야 옳다. 일각에선 “한명숙은 뭘 잘 모르니까 리모컨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뒷공론이 분분했다. 2006년 그가 첫 여성총리가 될 수 있었던 배경도 비슷했다. 전임 이해찬 ‘분권형 책임총리’가 권한과 독선과 막말을 휘두르다 ‘3·1절 골프파문’으로 전격 하차하자 민심을 눅일 만한 이미지가 필요했다. 그런 한명숙이어서 이번 전격 인사에는 이해찬도 놀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여성적 리더십은 부드럽다?

그들은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경선 전, 총선을 이끌려면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하다며 지레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한명숙은 이미 “제가 굉장히 부드러운 줄 알고 계시죠? 저만큼 강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하고 경고했는데도 사람들은 그의 강단과 추진력에 주목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명숙은 MB정권에서 단련을 받으면서 ‘철의 여인’으로 변신했는지 모른다. “정치검찰의 표적수사로 고통을 겪고, 두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해 한이 맺혔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아니면 원래는 자기 색깔이 분명한데도 안 그런 척 위장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철의 여인 원조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도 그랬다. 텃세 심한 남성사회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먼저 여성적인 면으로 그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게 중요하다. 대처는 권력을 장악한 뒤에야 어떤 남자보다 남자다운 본색을 드러냈다.

스물네 살의 꽃다운 새댁이 1968년 결혼 반년 만에 헤어진 남편을 13년간 옥바라지하며 기다린다는 건, 사랑보다 강한 그 무엇이 없고는 불가능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대학원 겸임교수가 ‘군사독재 시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투옥됐다’고 했지만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통일혁명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고 그 하부조직인 경제복지회의 리더가 박성준”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한명숙은 ‘남편의 죄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각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그가 어떤 믿음과 각성을 갖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총리 시절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불법 폭력시위가 벌어졌을 때 “시위대와 경찰, 정부 당국이 한 걸음씩 물러나 냉정을 되찾자”고 호소한 일을 떠올리면 불안해진다. 당시 그의 남편이 공동대표로 있는 ‘비폭력 평화물결’이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여성총리라서 철부지처럼 남편 편이나 들었다고 비판받으면 차라리 낫겠다. “시위대와 경찰을 등가(等價)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가운영의 기본원리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고 윤여준 씨는 최근 저서 ‘대통령의 자격’에서 지적했다. 한명숙이 이번 총선의 공천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이 가치중심이다. 총리의 믿음이, 제1야당 대표의 가치가 반미종북에 가깝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모두를 살릴 ‘살풀이’는 안 되나

2007년 한명숙은 대선 경선에 나서면서 “나는 노무현 리더십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이번 대표 경선 출정식에서는 “탐욕과 야만과 광기의 권력을 끊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지금 국민을 1%와 99%로 가르는 그의 언어는 노무현 시절 증오의 정치보다 표독하다. 자신의 무죄선고는 정의의 승리라면서 유죄선고 받은 임종석을 사무총장으로 밀어붙이는 건 그때를 능가하는 진영논리다. 벌써 ‘불통’ 소리 들어서는 여성적 리더십이 더 무섭다고 소문날까 겁난다. 정권을 잡기만 하면 나라를 갈아엎을 수도 있다는 결기를 한명숙은 너무나 일찍 드러냈다.

만일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민주당의 이름으로 새로운 탐욕과 야만과 광기의 권력을 시작한다면 모두의 불행이다. 정부여당에 실망한 적지 않은 국민들이 그가 수구좌파의 과격함을 풀어주는 진짜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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