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희창]게이 작가展은 되고 강연은 안되는 대관의 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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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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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동성애자라고 밝힌 뒤 지난 10년간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독하게 버텼습니다.”

28일 오후 6시 반 서울 용산구 남영동 주한 미국대사관 자료정보센터에서 ‘국내 커밍아웃 연예인 1호’ 홍석천 씨(39)와 함께하는 동성애자 인권 간담회가 열렸다. 홍 씨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선 동성애자가 인정받으려면 이성애자보다 딱 10배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 대사관이 주최한 이 간담회에는 ‘친구사이’를 비롯한 성소수자 인권단체 회원과 대학생 등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2시간 동안 홍 씨의 체험과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의 인권이 얼마나 신장됐는지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이 행사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월을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의 달’로 정한 데 따라 마련됐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와 관련한 공개 간담회가 열린 것은 이례적이다. 하지만 주최 측은 장소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당초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열 예정으로 80여 개 매체에 보도자료를 보냈으나 이 미술관을 관리하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이 25일 오후에 ‘장소 불허’를 통보한 것이다.

미 대사관의 패트릭 리너핸 공보참사관은 “공단 측이 ‘한국 정부기관으로서 이미지가 걱정된다. 한국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참석자들이 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허가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공단 뮤지엄팀의 안경찬 팀장은 “월요일에는 소마미술관이 오후 7시에 문을 닫는데 인권 간담회는 오후 9시 반까지 진행될 예정이어서 허가가 어려웠다”며 “관계자들이 개인적으로 그런(리너핸 참사관의 전언 같은) 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말했다.

소마미술관에서는 17일부터 ‘팝아트 슈퍼스타, 키스 해링’전이 열리고 있다. 28일까지 관람객이 1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의 낙서화가이자 인권운동가인 키스 해링은 커밍아웃한 게이였다. 이번 일로 미뤄 보면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외국 게이 작가의 전시는 한국이 받아들일 수 있으나 한국의 게이 방송인이 강연하는 간담회는 어렵다는 모순을 빚은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동성애를 다룬 영화 ‘왕의 남자’ ‘쌍화점’에 이어 홈드라마에 동성애 문제를 넣은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소를 불허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이며, 오늘 간담회에서 본 것처럼 ‘영 코리아(Young Korea)’는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한 리너핸 참사관의 말은 곱씹어봐야 한다. 성적 소수자 문제가 반드시 ‘영 코리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박희창 문화부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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