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정주현]아듀 슈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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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4일 14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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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 슈렉, 슈렉. 이름도 이상한 이 초록색 괴물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9년 전 이맘때였다.

별 생각 없이 극장에 들어갔던 나는 영화가 끝날 때쯤 너무나 흥분해서 '유레카!'라도 외칠 기세가 되었다. 슈렉의 '겁나 먼 왕국'은 그야말로 그 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한 신천지였으니까.

▶ 동화 비트는 발칙한 상상력

슈렉의 등장은 혁명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상영이 쉽지 않았던 재패니메이션과 극소수의 국산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디즈니 영화가 전부였다. 상영관에는 늘 아이들이 바글거렸고 어른들은 애니메이션이라면 극장보다 비디오를 선호했다. 그런데 슈렉은 달랐다. 이 발칙한 영화는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겠다고 작정을 한 영화 같았다. 빨간 모자를 쓴 늑대, 백설공주와 난쟁이들, 꼬마돼지 삼형제, 진저맨 쿠키, 미녀와 야수, 피노키오, 피터 팬 등, 너무도 친숙하게, 그리고 너무도 강력하게 머릿속에 박혀있던 동화 속 인물들이 총 출동해 보란 듯이 동화의 법칙을 비켜갔다. 어른들은 박수를 쳤다. 상식은 뒤집어졌다.

그 해 '슈렉'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만 제작비의 약 다섯 배에 가까운 수익을 거두었고 한국에서도 당시 '라이언 킹'이 가지고 있던 역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흥행성적을 갈아 치웠다. 애니메이션으로는 23년 만에 칸 영화제의 경쟁부분에도 진출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몬스터 주식회사'를 제치고 장편애니메이션 상을 받으며 평단의 지지도 얻었다.

그런데 '슈렉'의 성공은 단지 영화 한편의 성공이 아니었다. 이는 디즈니 왕국이 지배하고 있던 애니메이션 세계에 대반격이 시작되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슈렉은 바로 '타도 디즈니'의 기치를 내 걸고 새롭게 세워진 드림웍스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드림웍스는 1994년, 스티븐 스필버그와 제프리 카첸버그, 그리고 데이비드 게펜이 설립했다. 이 중 제프리 카첸버그는 디즈니에서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누가 로저 레빗을 모함했나' 등을 제작해 몰락하고 있던 디즈니를 부활시킨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인사조치에 불만을 품고 그곳을 뛰쳐나왔고, 법적 소송도 불사하는 등 디즈니와의 앙금이 깊었다. 데이비드 게펜 역시 95년 잠시 디즈니의 수장을 맡기도 했던 마이클 오비츠와 매우 오랫동안, 매우 공개적으로, 그리고 매우 적대적인 관계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시작부터 드림웍스는 노골적으로 '반-디즈니'였던 것이다.

사실 패기가 넘쳤던 출발과 달리 드림웍스의 초창기는 그리 순탄치 못했다. 스필버그의 지휘하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메리칸 뷰티' '글래디에이터' 등 할리우드의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들과 합작하여 내놓은 실사 작품들이 줄줄이 성공한 것과는 달리, 정작 애니메이션 부분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개미' (디즈니의 '벅스 라이프'에 대항해 만들었던), '엘도라도', '이집트의 왕자' 등 초기 작품들은 간신히 명색을 유지하거나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제프리 카첸버그의 호기로운 도전은 한나절의 오기로 끝나는 듯 했다.

이러한 상황을 급반전 시킨 것은 바로 '슈렉'이었다. 슈렉의 통렬한 디즈니 풍자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디즈니식 세계관을 비판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80년 동안 구축되어 온 디즈니 왕국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와 사랑스런 세 아이를 둔 가장 슈렉. 그는 하루만이라도 자유로운 괴물이 되고 싶었다.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와 사랑스런 세 아이를 둔 가장 슈렉. 그는 하루만이라도 자유로운 괴물이 되고 싶었다.

▶ 디즈니, 명품 소비주의, TV쇼… 경계 없는 풍자!

드림웍스가 '슈렉'을 통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디즈니의 이분법적 세계관이었다. 착한(=예쁜)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나쁜(=못 생긴)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적 메시지는 디즈니 만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이는 그 경계가 모호할 수 있는 실제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고, 악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무조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위험한 흑백논리를 아이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러나 슈렉은 어떠한가. 그는 나쁜 마법에 걸려 괴물로 변한 잘생긴 왕자님이 아니었다. 공주를 구하러 간 것은 자신의 평화로운 늪을 되돌려 받으려는 사생활 보호차원(?)이었다. 애벌레와 무언가의 눈깔을 먹기 좋아하고 피부는 초록색이며 배는 산만하다. 가끔씩 심통을 부리기도 하지만 예상 외로 심성은 착하고 징그럽던 얼굴도 보다 보면 귀엽고 정겹다. 피오나에게 마음을 뺏기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강한 남성과 아름다운 여성으로 대변되는 편협한 성 역할의 고착화 역시 '슈렉'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디즈니 왕국에서는 늘 아름답고 가냘픈 여자가 계단에 구두를 한쪽 남기고 오거나, 레이스가 드리워진 침대에서 영원히 잠을 자면서 수동적으로 자신을 구원해 줄 왕자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피오나는 어떠한가. 소탈하고 털털하며 심지어 이단 옆차기도 거뜬하다. 밤만 되면 늘씬하던 허리는 부풀어 오르고 높은 콧대는 들창코로 변한다. 하루의 반은 슈렉과 같은 오우거가 되는 마법에 걸렸기 때문인데, 슈렉과 사랑의 입맞춤을 하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예 오우거의 모습으로 변한다.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그의 선택은 프린스 차밍이 아닌 슈렉이었고, 화려한 왕궁이 아닌 수수한 늪으로 돌아와 슈렉과 꼭 닮은 아이까지 낳는다.

더불어 디즈니 영화에서는 금기시되어 있는 성인용 농담은 슈렉을 더욱 솔직하고 유쾌한 영화로 만들었다. 명품 소비주의나 자극적인 리얼리티 TV 쇼도 거침없는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관된 현실의식은 슈렉의 완결편인 '슈렉 포에버'로 이어진다.

▶ 만약 슈렉이 피오나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슈렉 시리즈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슈렉 포에버'는 그 이야기의 모티브를 찾아 제일 첫 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일 슈렉이 피오나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이 그것이다.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은 겁나 먼 왕국에서는 당치도 않은 꿈. 세월이 흘러 세 아이를 둔 중년가장이 된 슈렉은 하루하루 시끄럽게 반복되는 생활에 싫증을 느낀다. 권태기다. 단 하루만이라도 조용히 혼자 즐길 수 있었던 독신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던 그는 간교한 럼펠과 계약을 맺는다. 결과는, 예상할 수 있다시피, 엄청난 비극이다.

마법사 럼펠은 슈렉에게 딱 하루만 과거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계약서를 내민다.
마법사 럼펠은 슈렉에게 딱 하루만 과거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계약서를 내민다.

럼펠이 맞교환 한 것은 바로 슈렉이 태어나던 날 이었다. 즉 슈렉은 계약으로 얻은 하루가 지나면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슈렉이 없는 세상은 럼펠의 것이었다. 밝고 경쾌하던 겁나 먼 왕국은 마녀가 판을 치는 우울하고 음침한 세상으로 변했다. 눈빛 하나로 모든 이의 마음을 녹였던 장화 신은 고양이는 배가 너무 나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고, 마녀들의 마차를 끄는 동키는 슈렉을 알아 보지도 못한다. 피오나는 스스로 성에서 탈출해 럼펠에 맞서 오우거 반군을 이끄는 씩씩한 여 전사가 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뒤집은 만큼 캐릭터들도 모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창의성과 대담함과 풍자는 여전히 '슈렉'의 미덕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전편들에 비해 유머와 위트가 많이 반감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패러디하고 비틀 수 있는 것을 다 비틀어 버렸으니, 소재의 고갈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처럼 신나는 한판 난장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을 할 수도 있겠다.

슈렉과 피오나, 오거들이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 연주에 맞춰 일제히 춤을 춘다.
슈렉과 피오나, 오거들이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 연주에 맞춰 일제히 춤을 춘다.

▶ '슈렉'이 남긴 진짜 결실

이렇게 슈렉 시리즈는 시작된 지 10여 년 만에 많은 것을 남기고 막을 내린다. 이제는 더 이상 상식을 홀딱 깨는 초록색 뚱땡이 커플도,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마이크 마이어스와 캐머런 디아즈의 목소리도, 깨지고 부서지는 거라면 따를 자가 없던 진저맨 쿠키도 만날 수가 없다. 이들은 이제 한 시대를 풍미한, 과거의 추억이 되려 한다.

그렇다면 이제 디즈니와 드림웍스의 대결은 끝났다고 봐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2000년대 초 드림웍스의 공세와 내부 잡음 등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 듯했던 디즈니는, 2006년 '토이 스토리', '인크레더블' '니모를 찾아서' 등을 제작한 협력업체 픽사 ¤ 스티브 잡스가 소유하고 있던 - 를 완전히 인수해 다시 한번 비상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슈렉'의 성공 이후 계속적으로 '헷지' '쿵푸팬더' 등 히트작을 내 놓는 드림웍스에 맞서, 이제 디즈니는 '월E' '업' 등 수준 높은 작품들을 내놓으며 반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피나는 신경전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당사자들이야 어찌됐건 멋진 작품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된 관객의 입장에선 이들의 경쟁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슈렉'이 남긴 진짜 결실인지도 모르겠다. 아듀 슈렉! 아듀 피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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