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르상티망’의 사회, 대한민국

  • Array
  • 입력 2009년 10월 16일 02시 55분


‘르상티망(Ressentiment)’은 철학자 니체의 유명한 말로 약자의 질투와 패배자의 시기심 을 가리킨다. 승자를 마음속으로는 인정치 않는 원망(怨望)의 뜻도 담고 있다. 물리적으로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약자의 자기정당화가 르상티망의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니체의 화두에는 인간성의 그늘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다. ‘배가 고픈 것보다 배가 아픈 게 더 참기 어려운’ 우리 마음속의 비밀을 건드리는 것이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조금씩은 가진 이런 마음의 악마성이 제어되지 않을 때 그것은 사회심리와 문화의 문제가 된다.
한국은 르상티망을 억제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조장하는 사회인가. 시기심이 한 인격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르상티망의 사회적 만연은 한 나라의 국격(國格)의 실체를 폭로한다. 잘나가는 사람 발목 잡고 ‘못 먹는 밥에 재 뿌리는’ 게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그 결과 갈등과 불신이 무한 재생산되는 것이다. 예컨대 인사철이나 선거가 다가오면 투서와 흑색선전이 난무한다. 지난번 내각인사 때 청와대는 후보자들에 대한 음해성 투서의 홍수로 골머리를 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행태는 회사와 관공서마다 전방위적으로 반복된다. 사정기관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인사철에 쏟아지는 투서는 거의 허위로 판명되지만 그럴듯한 내용을 담고 있기 일쑤여서 당사자와 조직 전체에 큰 상처를 남긴다.

일본 무고 2명, 한국 1144명

어떤 조직에서나 좋은 자리는 희소하므로 위로 올라갈수록 경쟁이 치열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제는 경쟁자를 끌어내리려는 권력게임이 무차별적 해코지로 비화하는 데 있다. 그 결과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이 되는’ 풍토가 조성된다. 이를 입증하는 몇 가지 통계가 있다. 2007년 이후 무고 사건이 폭증하고 있는데, 무고죄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2007년에 819명, 2008년에 1144명이었다. 참고로 몇 년 전 일본 전체에서 무고죄로 기소된 사람은 그해 한 해에 총 2명이었다.
전반적인 고소·고발 건수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한 지역경찰청 2003년 자료에 의하면 4만여 건의 고소 사건 중 22%만 기소되고 나머지는 불기소나 기소유예 되었지만 고소인들은 그런 경우에도 항고나 재항고로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상대방을 괴롭히려는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다. 검찰에서 접수한 고소나 고발의 95%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저지른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로 2004년도 국가별 총 고소 사건은 한국이 60만 건 이상, 일본은 1만여 건이었다.
물론 르상티망의 문화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고소·고발·투서에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내부비리 고발은 부정부패를 막고 사회투명성을 높이기도 한다. 무기명투서 자체가 사회적 약자에게 불가피한 저항수단인 경우도 있다. 나아가 르상티망의 심리가 창조적으로 전환될 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의식을 동반할 수 있다. 질투가 좋은 의미의 경쟁을 촉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6·25전쟁은 민족사의 재앙이었지만 봉건적 계급사회의 잔재를 일소함으로써 시민들에게 동일한 출발점에서의 무한 경주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반도의 오랜 유산인 ‘헝그리 사회’를 한 세대 만에 넘어선 한국 산업혁명의 동력이 확보되고, 모두가 남들처럼 동등하게 대접받고 싶다는 한국 민주혁명의 계기가 점화되었다.
그러나 질투와 원망의 만연은 전 국민이 항상 불만족 상태에 놓인 ‘앵그리 사회’를 고착시킨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털면 먼지 안 나는 놈 없는’ 인간성의 보편적 약점에다 한국적 르상티망이 가세한 우리 사회는 언제나 과열상태다. 그 단적인 증거가 앞에서 제시한 통계자료인 것이다. 르상티망의 심리가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통제되는 데 비해 한국사회에서는 적절히 제어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의 인터넷상에 창궐하는 악성 댓글 문화에도 르상티망의 그림자가 짙다.

통합 해치는 ‘앵그리 사회’

질투심은 영웅을 죽이며 원망의 문화는 원한(怨恨)의 정치를 부른다. 헐뜯기와 원한이 판치는 풍토에서는 역사의 성과가 축적되지 않는다. 미래의 희망 대신 과거의 허물을 들추는 삶은 왜소해지고 통합에의 길은 멀어진다. 그런 점에서 르상티망은 우리 마음속에서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의 맹수다. 통제되지 않은 르상티망은 마음의 평화를 파괴할 뿐 아니라 선진국 진입의 꿈을 불가능하게 하는 악마가 아닐 수 없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