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박근혜와 일곱 난쟁이들

  • 입력 2008년 4월 10일 20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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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으로”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라고 말해준 정치인이 있었다. 나라와 민족을 내걸고 어떤 도원결의를 해도 정치적 이익이 없다 싶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더라며, 다시는 정치판에 몸담지 않을 것처럼 말했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낙선했다.

“속았다” 한마디에 敵將들 우수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중 박근혜 전 대표를 도왔던 한 비(非)정치인이 “박근혜는 정말 정치인답지 않은 정치인”이라고 한 적이 있다. 겉과 속이 똑같다는 의미에서다. 그가 속아 넘어간 게 아니라면, 총선 전 박근혜가 “속았다”고 한 말은 분명 사실이었을 거다.

“국민도 속았다”는 한마디에 그를 속인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인들이 대거 낙선함으로써, 박근혜의 위력은 다시 한 번 발휘됐다. 한나라당 밖에서 ‘친박’임을 무기로 당선된 정치인이 26명이다. 한때 국민이 망령 났다며 민의를 우습게 보는 세력이 존재했지만 국민은 다 알고 찍는다는 게 또 한 번 경험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과학적으로도, 투표야말로 개인적 이익 아닌 사회적 이득을 따져 행사하는 이성적 행위라는 게 미국 컬럼비아대 앤드루 겔만 교수의 최근 연구결과다. 이슈가 복잡할수록 유권자는 그걸 인간적 윤리적 가치의 문제로 쉽게 돌려 파악하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리더를 따른다는 보고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 국민은 사(邪)가 낀 사심의 정치는 싫다는 경고장을 날렸다는 얘기다.

이제 이명박 정부의 앞날은 박근혜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다며 다양한 시나리오가 떠돈다. 박근혜를 껴안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가기 힘들 거라며 당 밖에 선 친박 정치인들의 복당 논의도 분분하다. 반면 청와대와 한나라당에선 해당행위까지 했던 이들을 받아들이는 건 정도(正道)도, 민의도 아니라고 보는 모양이다. 살았으니 돌아가겠다는 친박세력과 부딪친다면 또 지긋지긋한 당권 다툼, 권력 투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게 생겼다.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가 뭘 얼마나 얻었는지 나는 관심이 없다. 친박임을 내걸지 않으면 홀로 서지도 못하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돼야만 박근혜가 살고, 그래서 5년 후 무엇이 될지도 미안하지만 내겐 관심 밖이다. 중요한 건 그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다.

이명박 정부가 발진 채비를 끝낸 국정과제는 한반도 대운하만 빼고 박근혜의 대선공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을 옥죄는 규제 철폐,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법치, 경쟁력을 높이는 교육 등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박근혜가 친박세력 아닌 국민을 보는 정치인이라면 이 정부의 국정운영을 도와야 박근혜답다.

더구나 그는 실용주의 정부엔 부족한 우뇌의 정서를 갖추고 있다. 이성적 좌뇌로 판단하면 분명 효율적이지만 그래도 내키지 않는 게 있다. 그게 마음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론 옳아도 마음을 얻지 못하면 진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박근혜에게 있다. 이 정부가 그와 함께 가야 할 이유다.

선거 아닌 국정능력을 보고 싶다

유능한 여자는 비호감이고, 여자다우면 유능하다고 평가받기 힘들다는 경험적, 과학적 사실은 무수히 많다.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은 유능함을 너무 드러내 대선가도에서 멀어지고 있고, 프랑스의 대통령후보였던 세골렌 루아얄은 여자답되 유능함을 보여주지 못해 탈락했다. 국방장관까지 지내고 대통령이 된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도 국정불만이 높아질수록 여자라서 그렇다는 비판이 나오는 형편이다.

박근혜는 여성이면서 여성이 아닌 것 같은 독특한 리더다. 그러나 장관 한번, 시도지사 한번 한 적 없다. 선거의 여왕인 건 분명하지만 지금껏 증명된 유능함은 거기까지다. 선거 때 유능했던 후보자가 반드시 유능한 대통령은 아니라는 걸 국민은 싫도록 봐왔다.

이제야말로 박근혜의 국정운영 능력을 보여줄 때다. 물론 청와대에서 그를 국정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일 거다. 하지만 청와대 신호만 기다릴 순 없다. 백의종군을 한들 또 어떤가. 권력다툼으로 지새우기엔 시간이 아깝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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