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영토 통치 목적…”수도를 5곳에 설치한 발해의 五京제도

  • 입력 2007년 9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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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수도가 다섯인 것은 당(唐) 5경(五京)제의 영향이 아니라 부여·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내재적 발전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8월 박사학위 졸업논문 ‘발해 문왕(文王)대의 지배체제 연구’(필자 김진광)가 그것. 국내 15번째 발해사 전공 박사논문인 이 논문은 발해 3대 문왕의 재위기간(737∼793년)에 ‘사방 5000리’에 이르는 발해의 최대 판도가 확정됐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성 6부제 같은 중앙행정체제와 5경 15부 62주의 지방행정체제가 완비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이 같은 제도의 완비가 이뤄진 시점은 10대 선왕(宣王·818∼830년) 때라는 것이 그동안 학계의 주류 의견이었다.

김진광 박사가 특히 주목한 점은 발해 문왕 때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의 5경제가 확립되고 57년의 재위기간 중 사실상 4차례나 도읍지를 옮겼다는 점이다. 학계에선 발해의 5경제를 당의 제도를 수입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나 당의 5경제는 본래 4경제였다가 ‘안사의 난’(755년) 때 현종의 피란처였던 남경을 757년 다섯 번째 수도로 지정하면서 성립됐으며 그나마도 불과 4년 뒤인 761년 폐지됐다. 또한 후대 중원을 장악한 국가들로 계승되지도 못했다. 반면 발해의 5경제는 755∼756년경 중경(당시 지명은 현주·顯州)에서 상경으로 천도할 즈음부터 성립했다고 봐야 하며 이후 요와 금의 5경제로 계승됐다는 점에서 그 기원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이 김 박사의 지적이다. 북경에 해당하는 상경의 명칭에 이미 상하좌우와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방위의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과 발해의 5경제가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긴 하지만 당의 5경이 내란의 산물이라면 발해와 요·금의 5경은 광활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내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왕은 동모산→중경→상경→동경으로 3차례의 천도를 단행됐고 다시 상경으로 천도를 준비하다 그 1년 전에 숨졌다.

김 박사는 이처럼 발해의 천도가 문왕 때 집중된 것은 새로 획득된 영토와 다양한 이민족에 대한 통치력 강화라는 내재적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이는 발해의 상경천도가 ‘안사의 난’ 이후 당의 내분을 이용한 적극적 북방정책의 일환이라면 동경천도를 일본과 외교관계 강화를 위한 동방정책의 포석이란 식으로 대외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던 것과 차별화된 시각이다.

실제 문왕 사후 4∼9대 25년간 계속된 내분과 잦은 왕의 교체로 왕권 약화와 영토 축소가 이뤄지면서 수도가 상경으로 고정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10대 선왕 때 이뤄진 정복 활동이 그 과정에서 발해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게 된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발해의 5경제가 이처럼 내재적 발전 논리에 의해 도입됐다는 점에서 오히려 영토가 겹치는 부여의 5가(五加)제나 고구려의 5부(五部)제 또는 신라의 5소경(五小京)제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27년 발해 2대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했다”고 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 박사는 “발해 문왕 때에 들어서 비로소 자신을 천손(天孫)으로 지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칭하기 시작한 점은 독자적 천하관을 구축했던 고구려의 천손의식을 명실상부하게 계승할 수 있는 토대를 완비했기 때문”이라며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기틀은 선왕 때가 아닌 문왕 때부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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