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은희]美의 획일화 강요하는 사회

  • 입력 2006년 3월 2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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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1980년대 대표적 미인으로 손꼽히던 여배우가 디자인한 속옷 광고를 보았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미인으로 손꼽히는 그녀는 속옷 디자인만이 아니라, 직접 그 속옷을 입고 모델로도 나설 정도로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몸매는 어지간한 20대 모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졌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그녀라면 싱싱한 청춘만이 아니라, 세월을 자연스레 품은 원숙함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 내심 기대했기 때문인가 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변한다. 토실토실했던 아기의 뽀얀 피부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드름과 주근깨로 얼룩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주름살과 반점이 자리 잡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날씬한 몸매를 자랑했던 사람도 나이 들면 여기저기 잡히는 군살을 감추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간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런 모습들이 피해야 할 1순위가 되고 있는 듯하다. 21세기 현대 한국사회의 강력한 ‘호감 코드’는 동안(童顔)과 ‘몸짱’이니까.

그렇기에 현대를 사는 중년들은 서글퍼 보인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서러운데 젊고 파릇한 후배들은 자꾸만 치고 올라오고, 늘어난 뱃살에 보정속옷 광고를 뒤적이지만 ‘봄날 아줌마’의 열풍은 어쩐지 지난 세월의 게으름을 질책하는 것 같아 더욱 움츠러들 뿐이다. 그간 팍팍한 삶을 열심히 살아 낸 것뿐인데 누구 하나 칭찬해 주는 사람은 없고 주름진 얼굴과 불어난 몸만을 힐끗거린다. 세월 가득한 주름진 얼굴과 중력친화적인 방향으로 늘어난 살들은 21세기의 현실에서는 ‘비호감’ 코드일 뿐이니까.

이런 현실에서 얼마 전 들려 온 김형곤 씨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서글픈 중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한동안 시사 풍자 코미디로 시대를 대표하던 코미디언이던 그도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뒤, 어느 순간 소외된 중년이 되어 사회에서 밀려났다. 결국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다시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했고 몸무게도 줄였지만 그의 복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를 찾아 온 것은 사우나로 땀을 많이 흘린 상태에서 격렬한 운동을 하여 탈진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의 죽음 이후 매스컴은 그의 다이어트 방법은 탈수를 일으킬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하다는 의학적 소견을 앞 다투어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엄청난 체중 감량에 성공했을 그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살을 빼기 위해 사우나 뒤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이미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누구도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단지 그가 ‘살을 뺐다’는 사실만을 부각시켰을 뿐. 물론 그가 그토록 살을 빼고 싶어 했던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젊고 날씬한 모습만을 요구하는 사회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오늘도 홈쇼핑은 젊고 늘씬하고 게다가 얼굴마저 비슷하게 예쁜 백인 모델들에게 속옷만을 입혀 내보낸다. 도무지 속옷을 선전하는 건지, 모델을 광고하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현대사회는 과거에 비해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이 중시되는 사회라는 사실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런데 왜 오직 한 가지, 아름다움의 기준만은 오히려 젊고 늘씬한 외모 하나로만 획일화되는 것일까. 사회가 다양해지는 만큼, 아름다움의 기준 역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이은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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