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하 신드롬]청순가련 뒤에 숨은 「눈빛연기」

  • 입력 1999년 4월 12일 19시 51분


《깨물어주고 싶도록 사랑스러운 얼굴, 돌아서면 어느새 시퍼런 독기를 내뿜는 신들린 연기…. 배우 심은하(27)의 연기에 한껏 물이 올랐다. 최근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TV연기대상을 수상해 영화와 TV를 동시에 평정했다. 심은하의 연기와 매력을 알아본다.》

심은하라는 연기자를 처음 본 것은 94년에 방영된 ‘마지막 승부’라는 TV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극중에서 다슬이 역을 맡았던 그녀는 순정 만화의 주인공 같은 이미지로 하루 아침에 젊은 층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녀를 특정한 세대의 우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걸 부정하는 것이 새로운 세대의 특징으로 포장되던 시대에 어째서 그녀처럼 순정한 이미지의 소유자가 오히려 젊은 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일까.

그것이 나에게는 기막힌 아이러니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신세대의 실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오해를 신세대 스스로 불식시킨 결과로 되새겨지기도 했다. 아무튼 그와같은 과정을 거치며 그녀에게는 청순가련형이라는 전형적인 굴레가 씌워졌다. 그녀의 눈빛에 감추어진 깊은 내부지향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결과였다.

심은하의 눈빛은 아직 열리지 않은 우주처럼 ‘미정형의 잠재태’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인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가변적인 기운이 충만해 있는 것이다. 청순가련형이라는 이미지로 단순하게 치부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연기자 심은하’는 긴 터널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미술관옆 동물원’을 거치면서 그녀의 눈빛은 주변의 각광없이도 제 스스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라마 ‘청춘의 덫’에 이르러 사회적인 보상심리와 결탁하고 또한 그것을 승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1년 전에 방영됐던 지극히 도식적인 구조의 드라마 ‘청춘의 덫’이 오늘 다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의 이면에는 뿌리 깊은 ‘배신의 사회학’이 있다. 경제적인 미래를 낙관하던 국민의 가슴에 피멍으로 자리잡은 IMF사태―그것에 대한 정서가 깊은 배신감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하지만 경제청문회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선선히 시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장을 잃고 가정이 무너져도 서민들은 복수할 대상을 찾아낼 수 없었다. 바로 그 시점에 ‘청춘의 덫’은 리메이크됐고 연기자 심은하의 눈빛은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랑을 저버린 남자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부도덕성으로 치환되고 그를 응징하는 심은하의 연기는 도덕적 단죄의 차원으로까지 승화된다. 배신당하고 자신의 딸까지 죽게 됐을 때, 그녀는 서릿발이 선 듯한 눈빛으로 “당신을 부숴버리고 말겠어”라고 남자에게 선언한다. 그 지점에서 심은하의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어째서 이 시대가 심은하의 눈빛을 필요로 하는가. 더이상의 언급은 사족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박상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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