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면역 결핍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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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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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1347년 크림 공화국의 한 도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정복하려는 몽골 킵차크 부대와 정복당하지 않으려는 도시민의 사투. 몽골 부대가 ‘비밀병기’를 꺼냈다. 흑사병으로 죽은 병사의 시신이었다. 병기를 투석기에 올린 뒤 성 안으로 날렸다. 흑사병이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작전 성공. 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생화학전’인 셈이다.

이 도시에는 이탈리아 교역소가 있었다. 그곳에 있던 상인들이 얼마 후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미 흑사병 환자. 곧 주변 사람들에게 병을 전염시켰다. 유럽 인구의 30% 이상을 죽인 ‘대(大)흑사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대유행병(Pandemic)의 원인을 둘러싼 가설이 많다. 가장 유력한 것이 ‘실크로드 전파설’. 실크로드를 지배한 몽골의 군대와 상인이 이 길을 통해 서방세계로 진출하면서 병까지 퍼뜨렸다는 설명이다.

1330년대 초반 중국 일부 지역에서 흑사병이 돌았다는 점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허베이 일대에서는 주민의 90% 가까이가 사망했을 정도. 흑사병의 첫 발생지는 몽골이 지배하던 중국이었던 것이다. 이후 간간이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돌았지만 유럽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비밀은 ‘면역력’에 있었다. 일찍 병을 겪으면서 면역력도 일찍 얻었다는 분석이다.

서인도 제도의 작은 나라 아이티. 국민의 대다수는 흑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흑인 국가는 아니었다. 아이티가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인 1492년. 콜럼버스는 이곳을 인도로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이 원주민은 16세기 초반에 전멸했다. 스페인 군대의 학살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도 면역의 문제가 발생했다. 스페인 병사들은 독감, 홍역, 천연두 같은 ‘유럽의 질병’을 왕창 전파했다. 면역력이 없는 원주민들이 잇달아 목숨을 잃었다.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정복자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공수했다. 그 노예들이 1791년 봉기해 최초로 흑인 공화국을 만들었다. 아이티 공화국의 탄생 역사다.

이처럼 전염병은 면역력 문제로 귀결된다. 면역력이 없을 때 치명적인 대유행병으로 번지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전 세계가 면역 문제에 잘 대처하고 있다. 원인 모를 전염병이 발생하면 관련 정보를 각국 정부가 신속하게 공유한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한 ‘살인 독감’이 H3N2 유형이고, 국내 독감은 H1N1 유형이라는 점까지 낱낱이 공개된다.

백신만 접종하면 독감의 경우 쉽게 예방이 가능하다. 인공적으로 면역력을 키울 수도 있는 것. 손을 잘 씻고 햇볕을 충분히 쬐며 신선한 과일을 먹으면 면역력이 증강된다는 점은 이미 상식이 됐다. 이러니 독감쯤은 크게 걱정할 질병도 아니다.

유독 면역이 정말로 어려운 영역이 있다. 어제의 아픔을, 오늘도 겪는다. 어쩌면 내일도 반복될 것이다. 인간관계의 불협화음에서 생기는 스트레스. 이 영역에서는 항체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중견 기업에 다니는 한 후배와의 술자리에서도 ‘인간관계의 면역’이 주제가 됐다. 그 후배는 푸념하듯 이렇게 말했다. “정말 우리 부장님은 이해가 안 가. 도무지 적응이 안 돼. 적응이….”

후배에 따르면 그 상사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란다. 그 때문에 매번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 후배의 말이 사실인지는 그 상사를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다. 다만 이 땅의 직장인 대부분이 이런 ‘면역 결핍’으로 괴로워한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주사 한 방으로 인간관계 면역력을 키울 수 있는 백신이 있으면 좋으련만. 없으니 해법은 소통밖에 없다. 먼저 다가서는 사람이 ‘항체’가 되리니.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면역 결핍#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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