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 만난사람] 포크듀엣 ‘4월과5월’ 멤버 백·순·진

  • 입력 2008년 12월 6일 07시 30분


열아홉 남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무조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나. 가진 게 없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음악이 있었다. 여인에게 헌정하는 노래를, 이왕이면 그녀의 이름을 따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별의별 애를 써봤지만 이상하게 곡이 안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꿈속에서 멜로디가 흘렀다.벌떡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악보를 적었다. 악보를 봉투에 접어 넣고, 구리반지 하나를 사서 여자를 찾아갔다. “내가 이 곡을 꼭 히트시킬 테니 두고 봐라”했다. 여자는 픽 웃더니 고맙다며 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

두 사람은 대천해수욕장에 갔다. 대천 온 바다에 노래가 넘실댔다. 캠프마다 청춘남녀들이 통기타를 끼고 앉아 ‘너와 맹세한 반지 보며 오늘도 젖은 짚단 태우듯 또 하루를 보냈다. 화가 이 세상 끝에 있다면 끝까지 따르리’를 불러댔다.

여자가 “와!”하고 감격했다. 남자도 가슴 한 구석이 울컥했다. 대한민국 포크 전성시대의 간판듀엣 4월과5월의 대표곡이자 불멸의 히트곡 ‘화(和)’는 이렇게 탄생했다.

4월과5월은 1972년에 결성돼 1975년까지 3년 남짓 활동하며 4장의 음반을 남겼다.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활동기간이었지만 이들은 어니언스(이수영·임창제)와 함께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아이콘으로 군림했다.

종로구 서린동 사무실에서 만난 4월과5월의 멤버 백순진(59) 씨는 “요즘으로 치면 SG워너비 정도가 아니었을까”하며 웃었다.

백순진 씨는 현재 노스웨스트 등 외국항공 국내 총대리점이라 할 수 있는 주식회사 샤프의 부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15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2년 전에 귀국했다. 사업가로 전향했지만 음악에 대한 갈증은 삭일 수 없었다. 때마침 이 땅을 강타한 7080붐이 4월과5월의 복귀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백순진, 김태풍(영창파트너즈 대표)의 4월과5월은 결국 재결합했다. 7080무대 같은 곳은 가급적 자제하고 교회, 고아원 등을 돌며 자선공연을 갖는다. 백순진 씨는 한국싱어송라이터협의회 회장을 맡아 ‘자작자창’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백순진 씨는 4월과5월의 주옥같은 대부분의 곡들을 직접 작곡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리더이다. 음악을 하게 된 동기를 물으니 흐흐흐 웃는다.

“어렸을 때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이모가 계셨는데, 집에 오시면 늘 ‘볼기 보여주면 100원 주지’하셨죠. 그래서 엉덩이 까 보여드리고 100원씩을 탁탁 받았어요. 조금 크니까 이번엔 ‘노래 부르면 100원 주지’로 바뀌는 거예요. 이모만 오시면 100원 받는 맛에 노래를 불렀죠.”

전학 첫날 부른 동요에 처녀교사 ‘울컥’

백순진이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건이 국민학교 2학년 때에 일어났다. 남산국민학교에서 서대문국민학교로 전학을 가니 급우들이 ‘새로 전학오면 노래해야 한다’며 교탁 앞으로 내몰았다.

잔뜩 감정을 잡고 ‘소라껍질’이란 동요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처녀 선생님이 와락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미묘한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쨌든 백순진 씨는 그때부터 ‘내가 노래를 잘 하는구나’하고 (본인 말로) 착각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당시의 ‘김모 선생님’을 찾고 있다.

사촌형이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홀딱 반해 부모님을 졸라댔다. 음악을 잘 모르는 부모님은 고1 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기타(그것도 전기기타!)를 사주었다. “사달란다고 멋모르고 사주셨다가 아들놈이 완전히 거기에 미쳐버리니 난리가 난 거죠. 학창시절에 부모님 손에 부서져나간 기타만 6대인가 될 거예요.”

휘문고 2학년 시절에는 오승근, 홍순백(두 사람은 훗날 투에이스라는 듀엣으로 활동한다) 등과 함께 연합 그룹사운드 ‘엔젤스’를 결성해 옛 서울예식장에서 리사이틀씩이나 가졌다. 당대 여고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크리스마스 때면 여기저기 미팅에 불려 다니기도 했다(물론 걸리면 정학이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의 열렬한 팬이었던 백순진은 사이먼&가펑클을 만나면서 포크음악에 눈을 떴다.

이수만 녹음후 하차…김태풍과 활동

“사실 난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작곡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노래 잘 하는 놈 하나 잡아서 가자’했던 거죠.”

그래서 소개를 받은 것이 현재 SM엔터테인먼트 이사인 이수만이었다. 이수만과 4월과5월을 만들어 1972년 5월 ‘화’, ‘절망하지 마라’, ‘욕심없는 마음’이 수록된 데뷔음반을 냈다. 그런데 이수만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중도 하차했다.

“그 때 마침 김태풍이 우리 집에 와 있었어요. 나름대로 자기도 듀엣을 만들어서 연습을 했죠. 이수만의 빈 자리를 채워야 하니까 김태풍보고 ‘같이 4월과5월을 하자’고 꼬셨죠.”

그래서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1집은 백순진과 이수만이 녹음을 했지만, 음반표지에는 백순진과 김태풍의 사진이 실렸다. 물론 음반 트랙에는 김태풍의 음성이 한 곡도 들어있지 않았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이다.

당시 4월과5월이란 듀엣명이 화제가 됐다. ‘트윈폴리오’, ‘트리플’, ‘쉐그린’, ‘뚜아에무아’, ‘라나에로스포’, ‘어니언스’, ‘투에이스’ 등 외국어 이름이 판을 치던 시대에 4월과5월은 유일한 우리말 듀엣, 아니 이중창단이었다.

“미국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죠.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본을 따라갈 수 없다고도 했죠. 스스로 ‘엽전’이라며 비하하던 때였어요. 전 그게 열 받더라고요.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말인 4월과5월이라 한 거죠.”

4월과5월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화’에 얽힌 비화가 하나 더 있다. 이 노래는 LP로 녹음되기 전부터 라디오방송에서 릴테이프 녹음을 주야장창 틀어대 입소문이 나 있었다.

당연히 LP는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아 금지곡 판정이 났다. 표절곡이라는 것이었다. 정말일까?

“표절은 무슨. 그때는 젊은이들이 나와서 ‘안 된다’, ‘떠나지마’ 뭐 이런 분위기면 다 금지였어요. 우리 노래 중에 ‘머리 깎고 명동에 나갔는데 경찰에게 걸려 싹둑’ 하는 가사가 들어있는 곡이 있었어요. 당연히 바로 금지곡이 됐죠.”

‘화’가 청와대 직속 모 기관과 당시 연예계 빅파워였던 DJ 이종환 사이에 벌어진 알력싸움의 희생양이 됐다는 설도 유력하다. 정보부 출신이던 기관 담당자는 이종환이 관련된 음반이 출시되면 무조건 금지를 시키고 봤다. 4월과5월의 음반 역시 이종환이 뒤에 있었다.

김태풍 음악대신 사랑 선택 ‘해체’

1975년 1월, 종로1가 쉘부르무대를 끝으로 4월과5월은 해체됐다. 해체 이유에 대해 연예계에서는 ‘김태풍의 군 입대’, ‘김태풍의 개인적 사정’, 심지어는 1975년 연예계를 초토화시킨 대마초사건 연루설 등이 떠돌았다. 당시 두 사람은 해체 이유에 대해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김태풍과 내가 생각이 달랐어요. 나는 쇼비즈니스, 요즘으로 치면 기획사를 꿈꾸고 있었고, 김태풍은 가수생활에 희망이 없다고 봤죠. 김태풍에게는 여자가 있었어요. 외교관의 딸이었는데 김태풍의 여동생 친구였죠. 김태풍이 낙심하고 있으니 여자가 차라리 유학을 가자고 종용한 거예요.”

결국 김태풍이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4월과5월은 해체의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김태풍이 떠나고도 4월과5월은 조금 더 생명을 이어갔다. 김태풍의 빈 자리를 메운 새로운 멤버는 김정호였다. 동생의 친구였던 김정호를 보자마자 백순진은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봤다. 작곡, 노래, 기타솜씨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유명한 소리꾼이었고, 모친은 창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혈통부터가 남달랐던 사람이다.

‘가객’ 김정호 대타 영입 화음 맞춰

“사실 저는 김정호를 가수가 아니라 작곡가로 키우고 싶었어요. ‘이름모를 소녀’, ‘저 별과 달을’ 같은 곡들은 나와 공동작업을 한 거죠. 그런데 당장 명동의 쉘부르니 오비스캐빈이니 공연을 나가야 하는데 김태풍은 없고, 급한 김에 김정호를 데리고 간 거죠.”

김정호와의 4월과5월은 몇 개월 가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얀나비’의 김정호를 기억하면서도 그가 4월과5월 출신이었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해체 후 몇 년이 지나 4월과5월은 ‘당신에게선 ∼ 꽃내음이 나네요’하는 ‘장미’란 히트곡을 낸다. 지금까지도 ‘장미’는 4월과5월의 대표작 중 앞 선에 꼽힌다. 그런데 이 ‘장미’를 부른 4월과5월은 백순진-김태풍의 오리지널 멤버가 아니다.

30년만의 재결성 “세상의 빛이 되고파”

김태풍의 유학으로 인해 4월과5월을 해체한 백순진은 자신의 계획대로 기획사를 차리고는 가수 오정식, 이영식 등과 함께 듀엣 하야로비를 영입했다. 이 하야로비로 구성한 것이 후기 4월과5월이다.

물론 이들의 노래 ‘장미’는 백순진이 만들었다.

“우리가 나이가 많이 들게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우리 두 사람은 저 험한 세상의 등불이 되리. 그래서 만든 곡이 ‘등불’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시대의 등불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두운 세상의 작은 등불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4월’ 백순진과의 인터뷰가 끝났다. 12월의 오후 사무실에 봄의 햇살이 가득했던 것은, 장미의 내음을 맡았던 것은 분명 기자의 환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7080만이 누릴 수 있는 달착지근한 환상의 수혜였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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