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윤용현]날 놀라게 한 조상의 합금기술

  • 입력 2008년 3월 3일 03시 00분


유기(鍮器)란 구리에 주석을 합금한 청동, 아연을 합금한 황동의 일종으로 놋그릇이라고도 한다. 유기는 재료의 성분과 비율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구리를 기본으로 하는 비철금속계의 합금으로 그 시원은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에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상당한 수준의 청동 합금기술을 엿볼 수 있으며, 8세기경 신라에는 유기 제작을 전담하는 관서인 철유전(鐵鍮典)이 설치돼 합금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중국에서 ‘신라동’이라 일컬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기술은 일본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의 유기 제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그 합금기술이 더욱 발전해 화폐, 금속활자, 각종 악기뿐 아니라 생활용기가 제작되는 등 세계적으로 독특한 비철 합금기술인 유기를 만들었다.

유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주물과 방짜로 나뉜다. 주물은 구리에 아연, 주석 합금의 쇳물을 해감모래거푸집에 부어 촛대 향로 화로 등을 만드는 기법이고, 방짜는 구리와 주석 합금으로 바둑(괴)을 만든 다음 이 바둑을 불에 달구면서 망치나 메로 쳐 모양을 잡아간다. 징 꽹과리 대야 식기 수저 등을 만드는 기법이다. 방짜로 만든 것은 인체에 해롭지 않아 식기류로 많이 애용됐고 소리가 좋아 타악기로도 널리 사용됐다.

방짜란 용어에는 우리 고유의 과학기술이 숨어 있다. 대개 두드려 만드는 것을 방짜라 알고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구리 78%에 주석 22%를 정확히 합금한 것이 바로 방짜다. 즉 방짜는 가장 질 좋은 합금을 일컫는 합금기술 용어이며, 잡금속을 섞어 질이 떨어지는 합금은 퉁짜(쇠)라 했다. 이는 우리말의 진짜 가짜와 통하는 용어이다.

유기에선 선조들이 개발한 독특한 합금기술과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다. 즉 유기에 사용되는 주석의 함량은 22%인데, 현대 재료공학에서는 주석 함량이 20%가 넘으면 재료가 매우 취약해져 사용이 불가능한 합금 비율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이유로 주석을 10% 이상 섞지 말라고 권장한다. 주석의 깨지기 쉬운 성질 때문에 이를 넘으면 용기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방짜유기는 합금 비율이 정확하지 않으면 잘 만들어지지 않고, 22%의 주석 함량에도 잘 깨지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실제 유기의 산업화를 위해 현대 재료공학이론에 따라 유기를 만들어 보았으나 놋쇠가 너무 찐득해져 실패한 사례가 있다. 방짜는 현대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합금기술로 이것은 세계적인 신기술이다.

선조들이 이런 신기술을 개발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금속의 성질을 알고 적재적소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금속은 열을 가하면 열 풀림 현상으로 연해지며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가공경화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주석은 무르지만 열에 강한 물질로, 달궈져 있는 동안엔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다. 지속적인 열처리로 주석의 취약한 성질을 극복한 뒤 단조(鍛造)로 놋쇠를 열간가공(熱間加工)하여 잘 깨지지 않고 견고한, 실용성 있는 용기로 만들 수 있었다.

근래에 유기그릇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의 하나인 O-157균을 죽이는 살균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다. 또 독성 물질에 반응하고 보온 보냉 효과가 좋아 음식 맛을 살려주는 기능을 지니고 있어 현대 사회에서 참살이 열풍과 함께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유기의 합금기술에 대한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현대 첨단 과학기술과 접목해 기능성이 우수한 신소재 개발이 이뤄지면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 우수한 비철 소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것이 과학 한류가 아니겠는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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